21.12.11(토)
아침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야 했다. 뭐 거창한 건 아니고 아주 간단한 기본 검진이었다. 토요일이라 조금만 늦어도 대기 시간이 길다고 하길래 문 여는 시간에 딱 맞춰 가려고 알람을 맞췄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서윤이가 가장 먼저 일어나서 언니와 오빠를 깨웠다. 알람이 울리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을 때부터. 알람 소리와 함께 일어나는 아침도 참 힘들지만 알람 소리보다 먼저 일어나는 아침은 더 힘들다.
아내는 아직 누워서 자고 있었다. 이럴 때 소윤이가 정말 많이 컸다는 걸 느끼고 의지가 된다.
“얘들아. 아빠 갔다 올게. 소윤이는 동생들 좀 잘 챙겨줘”
아마 아내도 오래 누워 있지는 못했을 거다. 어찌 됐든 아내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소윤이에게 집을 맡기고 떠났다. 나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 몇 명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래 기다리지 않고 검진을 마쳤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이들은 아침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난 뒤에는 소윤이와 한의원에 가야 했다. 비염으로 고생하는 소윤이가 안쓰러워서 아는 분이 하시는 한의원에 가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아내가 소윤이를 데리고 가고 난 시윤이, 서윤이와 집에 남으려고 했는데 내가 데리고 가는 게 나아 보여서 바꾸기로 했다. 시윤이는 왠지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인 듯도 했고. 소윤이는 엄마든 아빠든 상관없다고 했다. 정말 그래 보였다.
소윤이는 집에서 나오자마자 내 손을 잡았다. 걸을 때마다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불안함에 부모의 손을 찾는 느낌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걷는 기분을 아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차에 태울 때도 조수석에 앉혔다.
“아빠. 엄마는 조수석에 절대 못 앉게 하셔여”
“그래? 맞아. 원래 조수석에 앉으면 안 돼. 위험해서”
“근데 아빠는 왜 앉게 해여?”
“음, 조심해서 운전하면 되니까. 맨날 그러는 건 아니니까”
아내는 우리가 나간 지 얼마 안 돼서 서윤이를 재웠다고 했다. 시윤이는 서윤이의 방해 없이 자동차를 타고 싶은 욕구가 충만했다. 아내가
“시윤아. 서윤이 재우고 나올 테니까 자동차 타고 있어”
라고 얘기하고 서윤이를 재우러 들어갔는데, 재우고 나와 보니 시윤이는 작은 방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고 했다. 막상 거실에 혼자 남으니 무서웠다고 했다. 어디선가 쿵쿵 소리도 나고. 소중한 혼자만의 시간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엄마를 기다리는데 썼다.
소윤이와 점심까지 먹고 들어갈까 하다가 그냥 집에 가서 먹기로 했다. 한의원과 카페에 잠깐 들르는 짧은 데이트 아닌 데이트였지만, 역시 소윤이와 둘이 다니는 건 무척 매력적이다. 시윤이와의 데이트도 해야 하는데 올해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점심 먹고 나서는 거실에 엎드려서 졸았다. 도서관에 들렀다가 장을 보러 가기로 했는데, 아내는 내가 너무 달콤하게 조니까 자기가 애들을 데리고 갔다 올 테니 좀 쉬라고 했다. 조금만 더 깊이 잠들었으면 잠에 취해서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그 정도로 깊이 잠들지는 않았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아내, 아이들과 함께 나왔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필요한 책을 아내가 고르는 동안 난 서윤이를 전담했다. 총 체류 시간으로 따지면 한 시간도 안 됐을 텐데, 노동 강도는 매우 셌다. 고농축 노동이랄까.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서윤이를 따라다니느라 애를 먹었다. 통제가 안 될 때는 들어 올려서 안고 다시 내려 주고 다시 안고 다시 내려 주고를 몇 번 반복하니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여보.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그래? 나갈까?”
“아니야. 천천히 봐”
괜찮지 않았지만 당장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막내를 향한 사랑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아내는 무슨 용기로 아이 셋을 데리고 혼자 도서관에 오겠다고 한 건지 궁금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봤지? 당분간 우리는 도서관에 못 오겠다는 거?”
“왜여? 엄마?”
“서윤이가 너무 힘들게 하니까”
아내는 소윤이와 시윤이의 책 말고도 자기가 볼 책을 충동적으로 쓸어 담았다.
“여보. 이 책은 뭐야? 여보 읽으려고 고른 거야?”
“어. 한 번 읽어 보려고”
“아”
저녁에도 일이 있었다. 나만의 일정이라 아내와 아이들은 집에 있었고 나만 나왔다. 저녁도 밖에서 먹었다. 모임은 꽤 늦게 끝났다. 집에 돌아오니 거의 자정이었다. 서윤이는 오늘도 깼다. 내가 사 준 하겐다즈를 아내가 딱 한 입 먹었을 때 자기가 방 문을 열고 나왔다. 아내는 남은 하겐다즈를 급히 먹었다. 서윤이는 자비롭게 그것만큼은 기다려 줬다.
서윤이는 아내의 손을 잡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고, 난 거실에 남아 조금 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