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10(금)
아내와 아이들은 오전에 처치홈스클 모임이 있어서 무척 바빴다(바빴는지 어쨌는지 듣지 못했지만, 분명히 그랬을 거다). 과연 아내의 하루에 바쁘지 않은 순간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바쁘지 않아도 바쁘지 않음을 느끼도록 아이들이 가만히 두는 순간이 있을까 싶다. 그래도 요즘은 아주 가끔 서윤이를 재우러 들어가서 같이 잔다거나 서윤이가 아니더라도 잠시 잘 때도 있다고 했다. 소윤이가 기꺼이 엄마의 쪽잠을 허락(?)한다고 했다. 소윤이가 참 많이 컸다. 몸도 마음도.
퇴근해서 만난 아내도 물론 바빠 보였다. 대체로 아이들이 먼저 나에게 달려오고 아내는 일단 목소리로 나를 맞이한다. 불앞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을 때가 많다. 오늘도 아내는 분주해 보였다. 식탁에 올라온 반찬을 보고 아내가 곁들이는 설명을 들으니, 냉장고에 있는 묵은 재료로 식탁을 구성하기 위해 아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느껴졌다. 사실 누가 옆에서 ‘오늘은 이거 해 먹어’ 하면서 재료만 딱딱 대령해 줘도 삼시세끼 차리는 수고가 많이 줄 거다.
아이들 입맛에는 너무나 건강한 맛일지도 모르는 오늘의 저녁을, 소윤이와 시윤이는 참 맛있게 먹었다. 아내는 오늘도 묘한 쾌감을 만끽했다. 아내의 수고와 노력에 하늘의 위로가 깃들기를 기원하는 감사 기도와 함께 시작한 저녁 식사였다. 자꾸 차린 게 없고 먹을 게 없다며 자책하는 아내를, 나와 아이들은 없어서 못 먹는다는 듯 맛에 몰입하는 태도로 격려했다.
거기에 오늘은 교회도 안 갔다. 아내는 절정의 행복을 만끽하는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고 나면 모든 진이 빠진 듯 축 늘어진다고 말했었다. 그 시간에 남편이 버티고 있으면 몸과 마음의 보탬이 되는 건 당연하다(자화자찬이 아니고 아내가 그렇게 얘기했다).
그 시간이 되면 나도 지치는 건 마찬가지다.
“소윤아. 들어가서 양치하고 세수하고 나와”
“아빠가 씻겨주면 안 돼여?”
소윤이가 애교를 잔뜩 넣어서 얘기했다. 소윤이야 얼마든지 스스로 씻는 게 가능하다. 어쩌면 오히려 나보다 더 꼼꼼하게 씻을지도 모른다. 종종 소윤이에게 혼자 씻으라고 하고 나서는 이렇게 재촉할 때도 많다.
“소윤아.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네? 저 세수하고 있는데여?”
나중에 들어 보면 아내가 알려준 대로 꼼꼼하게 구석구석 씻느라 그런 거였다. 내가 씻겨 주면 전형적인 ‘아빠의 세수’다. 거칠기만 하고 실효성은 떨어지는. 애들 씻겨 주러 들어가서 거울을 보면 폐인도 그런 폐인이 없다. 세상의 모든 피로는 혼자 짊어진 듯한 몰골일 때도 많다. ‘언제까지 이렇게 씻겨 주겠나’ 하는 생각으로 힘을 내곤 한다. 매 순간이 그렇다.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빛나는 시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의 피곤에 지쳐서 흘려보낼 때도 많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까지 차례대로 씻겼다. 샤워기로 엉덩이를 씻을 때 가렵고 따갑다며 호들갑과 함께 웃음을 터뜨리는 소윤이와 시윤이의 모습에 힘이 났다.
아내가 애들을 재우러 들어가면 커피를 사러 가기로 했다. 아이들이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인사를 나누고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방 안에서 책 읽는 소리가 들렸다. 불현듯 장난기가 발동했다. 거실 베란다 문으로 나가서 조심스럽게 안방 베란다 문쪽으로 갔다. 아주 조심스럽게 안방 베란다 문을 열었다. 커튼을 쳐서 문 여는 게 보이지는 않았다. 문을 다 열고 커튼을 젖히며 갑자기 아내와 아이들 사이로 등장했다.
“워!”
“으아아아아아아악”
역시나 아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기에 소윤이도 놀라고. 시윤이와 서윤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니 웃음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와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뒤집어졌다. 아내는 또 당했다는, 허탈한 미소를 머금었다.
“얘들아. 아빠 이제 진짜 나간다. 안녕”
문을 닫고 나와서 다시 거실 베란다 문으로 갔다. 또 안방 문으로 갔고. 아까와 똑같이. 처음처럼은 아니었지만 아내는 이번에도 만족스럽게(?) 놀랐다. 그러고 나서도 같은 짓을 한 번 더 했다. 난 나중에 아이들이 아빠를 추억할 때 여러 가지 모양으로 기억해 주면 좋겠지만 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게 있다.
‘우리 아빠는 진짜 재밌는 사람이었어. 아빠 때문에 많이 웃었어’
아이들이 꼽는 ‘장난 많이 치는 가족’ 순위에 항상 상위권이라 기분이 좋다.
커피를 사서 돌아왔을 때쯤 아내도 애들을 재우고 나왔다. 만족스러운 커피를 마시며 유퀴즈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