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16(목)
다행히 백신 접종의 후유증은 거의 없었다. 지난번에는 다음 날 몸이 많이 안 좋아서 일하는 내내 타이레놀을 먹었는데, 이번에는 멀쩡했다. 다행이었다. 혹시 몰라서 아침에 타이레놀 한 알을 먹었는데 그것 때문이었는지 점심 먹고 무척 졸렸다.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아내는 오전에 기도 모임을 마치고 장모님께 간다고 했다. 소윤이를 데리고 한의원에 갔을 때 선생님께서 고기를 많이 먹이라고 하셨다. 비염도 체력이 떨어지면 심해진다고 하시면서. 나중에 아내에게 들었는데 소윤이는 그 얘기가 엄청 반가웠다고 했다. 요즘 고기 먹는 일이 좀 뜸하긴 했는데, 그게 기분 좋을 정도인 건 의외였다. 오늘 장모님께 가면 아마 소윤이가 그 이야기를 할 테고 그럼 장모님은 한가득 고기를 사 주실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이야기를, 어제 아내와 나눴다. 아니나 다를까 퇴근하고 집에 오니 질 좋은 고기가 두 팩이나 있었다.
“애들만 조금 구워서 먹이자”
아내가 그렇게 얘기한 건 아마도 뒤처리가 간편한 저녁식사를 향한 본능이 발휘되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내가 되물었다.
“왜? 애들만 먹어? 특별히 이유가 있어?”
“어? 아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말했네. 우리도 같이 먹어도 되고”
“여보도 좀 먹어. 여보도 체력을 생각해서. 애들 먹일 생각만 하지 말고”
아내도 요즘 어지럽다는 말을 자주 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끼니를 제때 못 챙겨 먹는 게 크다고 본다. 먹는 양이나 아내의 즐거움을 기준으로 따지면 빵이 주식이 된 지도 오래됐다.
퇴근하자마자 불앞에 서서 고기를 구웠다. 집에서 고기를 굽는 일 또한 아내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한다. 내가 하면 기름이 안 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조심성이 없기 때문에 더 난장판이 된다. 다만, 어차피 스트레스 받을 일 구울 때까지 받지 말고 그냥 치울 때만 받으라는 나의 얕은 뜻이 담겼다.
한동안 고기를 거부하던 서윤이도 잘 먹었다. 치킨도 잘 먹더니 이제 고기 거부는 완전히 끝났나 보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물론 잘 먹었다. 유난히 더 맛있어하고 만족스러워하면서. 아내는 내 기준으로는 몇 점 안 먹었는데 배가 부르다고 했다. 항상 비슷하다.
“여보. 왜 이렇게 안 먹어? 좀 더 먹어?”
“나? 엄청 많이 먹었어. 배불러”
아내도 나에게 비슷한 말을 많이 한다.
“여보. 왜 이렇게 안 먹어? 얼른 먹어”
“나? 엄청 많이 먹고 있는데?”
난 진짜 많이 먹고 있을 때가 많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나도 안 먹는 듯하면서 사실은 엄청 먹는다. 어차피 살이 찔 거라면 ‘저렇게 먹으니까 살이 찌지’라는 소리보다는 ‘별로 안 먹는 거 같은데 왜 살이 찌지?’라는 소리를 듣는 게 차라리 낫다.
아내는 저녁 먹고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지인에게 줄 선물을 사야 하는데 시간이 오늘밖에 없었다. 이미 낮에 결정한 일이라 아이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에 담담했다. 서윤이도 마찬가지이긴 했는데 뭣도 모르고 무조건 알았다고 하는 듯했다.
아이들과 함께 방에 누웠고 아내가 차례대로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서윤이는 이제서야 현실을 깨달았다는 듯 엄마를 쫓아 나가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오늘은 저항이 조금 심했다. 자기가 방 문을 열고 거실에 나가기도 했다. 다행히 아내가 나가고 난 뒤라 오히려 서윤이가 포기하는 계기가 되긴 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고요함이 찾아왔다. 셋 모두 금방 잠들었다. 아내의 유산이었다. 장모님께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시윤이와 서윤이는 거의 잠들기 직전이었다. 아내가 혼신의 수다를 떨며 둘을 깨운 덕분에 차에서 잠들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더 늦은 저녁에는 온라인 모임이 있었다. 아내는 모임 시작 전에 돌아왔다. 늦은 시간에 시작한 만큼 엄청 늦게 끝났다. 모임을 시작할 즈음에 몸이 약간 으슬으슬하고 느낌이 이상해서 타이레놀을 한 알 더 먹었다. 나도 본능적으로 항상 아프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다. 불혹에 가까워지고 예전에 몰랐던 병(?)을 자주 앓다 보니 더 그렇게 됐다. 거기에 아빠와 남편이라는 역할을 자각할 때마다 더 그렇다. 잘 마시지 않는 따끈한 차까지 내려 먹었다.
서윤이는 오늘도 깨서 나왔다. 나와 아내에게 번갈아 안기다가 결국에는 소파에 누워서 잠들었다. 입을 반쯤 벌리고 아주 깊게. 세상의 모든 근심과 시름을 잊게 만드는 한 가지 장면을 뽑으라고 하면 난 자녀가 자는 모습을 꼽겠다. 아내와 보고 또 보고 얘기하고 또 얘기했다. 특별한 주제나 내용은 없었다. 그냥 소파에 누워 세상 평온한 표정으로 자는 서윤이의 모습에 관한 엄마와 아빠의 감탄이었다. 굉장히 늦은 시간이고 내일은 여전히 평일이라는 사실도 잊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