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먼 부모라는 이름

21.12.28(화)

by 어깨아빠

혼자 있어야 제대로 된 매력을 뿜어내는 시윤이는, 아침부터 아내를 많이 힘들게 했다. 아내의 고충 토로에 언제나처럼 위로와 격려, 그리고 원론적인 대답 말고는 해 줄 게 없었다. 아내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내도 얘기할 데가 남편뿐(은 아니고 몇몇 친한 친구도 있지만)이라 하소연을 하는 차원이었다. 애들을 모두 재우고 아내가 조금 더 자세히 전해 주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아내도 나도 웃음이 나왔다. 지나고 나면 그저 치열했던 추억이 되는 느낌이랄까. 군인 시절을 회상하는 느낌하고 비슷하달까.


“여보. 하아. 내가 지금 이렇게 웃어서 그렇지. 아까는 정말 힘들었어”

“그래. 맞아. 그 순간에는 그렇지 진짜”


내가 듣기에도 오늘은 좀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아내는 역시나 나름대로 원숙하고 지혜롭게 모든 상황을 보내고 나름의 유익함을 취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아내와 아이들은 오늘도 집에만 있었다. 다들 오늘도 잠옷 차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녁 먹고 산책이라도 데리고 나가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목장 모임을 해야 했다. 외출은커녕 저녁 먹고 잘 준비하기에 바빴다. 얼마 전부터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꼬박꼬박 씻겨 주고 있다. 그전에는 힘들고 귀찮고 그러면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알아서 씻으라고 할 때도 종종 있었고, 그 빈도가 늘어났다. 어느 날 아내가 시윤이와 대화를 나눴는데, 시윤이는 양말 신는 게 너무 어렵고 혼자 씻을 때도 꼼꼼하게 씻기가 어렵다고 했다는 거다. 사실 소윤이도 아직 엄마나 아빠가 해 주는 걸 좋아한다. 워낙 잘 하니까 시키고 도움받을 때가 많지만. 누나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직 다섯 살인 시윤이도 ‘혼자’ 해야 하는 게 늘어났다. 그러고 나서 느긋하고 너그럽게 기다려 주고받아 주기보다는 ‘진짜 못해서 힘들어하는’ 시윤이를 다그칠 때도 많았다. 아내와 내가 진짜 ‘홀로 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려고 그렇게 했으면 모를까 사실은 귀찮아서 떠민 게 대부분이라 다시 방향을 바꿨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서윤이는 굉장히 대충 씻기곤 한다. 물론 이것도 나만 그럴지도 모른다. ‘엄마와 목욕탕에 가면 오래 걸리는데 아빠와 가면 순식간에 나오는 법칙’은 우리 집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난 목장 모임을 준비(라고 해 봐야 시간에 맞춰 자리에 앉는 거지만) 하느라, 아내는 저녁 먹는 걸 치우느라 바빴다. 아이들하고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누고 헤어졌다. 아내는 오늘도 나의 목장 모임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겨우 나왔다.


아내는 소윤이가 낮에 쓴 편지를 보여줬다. 아내와 나에게 쓴 건 아니었고 아는 이모와 친구에게 줄 편지였다. 소윤이는 각각의 편지에 전할 말과 함께 성경 구절도 적었다고 했다. 아내의 사주(?)가 아닌 순전히 자기 의지로, 어떤 구절을 적고 싶은지까지 얘기했다고 했다. 소윤이가 찾아서 적은 구절을 보니 뭔가 편지를 받는 사람에게 딱 맞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방금 막 이별을 한 사람은 어떤 가요를 들어도 다 자기 얘기하는 것 같은 현상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신기했다. 소윤이가 편지와 선물을 전달하는 목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것 같았다. 시윤이도 자기 능력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 아마 시윤이도 마음으로는 누나처럼 유려하게(?) 쓰고 싶었을 거다. 그 마음을 아니까 시윤이의 서툰 글과 그림이 참 귀하게 보였다.


자녀들을 볼 때마다 나의 모습이 너무 진하게 보여서 슬프고 두려울 때가 있다. 자녀는 부모가 보여 주는 만큼 자란다는 말이 무섭게 옆에 설 때도 있고, 준비된 부모는 없다는 말에 한없이 안심할 때도 있다.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아무렇게나 기를 수는 없는 자리가 부모가 아닐까 싶다.


오늘은 ‘나보다 낫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날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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