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2.02.17(목)

by 어깨아빠

“여보. 오늘은 우리 별일 없지?”

“오늘? 그런 거 아닌가?”


요즘 하도 밤에 이런저런 일정이 많아서 아무런 일도 없는 게 영 어색했다. 내가 퇴근하고 난 이후의 이야기다. 다른 일이 있건 없건 아이들을 재우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은 비슷하지만 마음의 여유가 다르다.


아내는 어제 자기 전에


“여보. 쌀이 없네. 내일 내가 아침에 나가서 장을 보고 오는 게 가능할까?”


라고 물었다. 한살림이 문을 여는 시간은 10시고 온라인 기도 모임을 시작하는 시간은 10시 30분이었다. 그전에 애들 아침을 다 먹이고 난 뒤에 옷을 모두 갈아입혀서 나갈 준비를 하는 게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물음이었다. 난 단호하게 대답했다.


“놉. 불가능”

“왜?”

“힘들어. 여보가 애들 일어났을 때 벌떡 일어나서 준비하면 모를까. 그게 어렵잖아”

“와, 오기 생기네”


그러면서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를 좀 깨워 달라고 했다. 무조건 깨워 달라는 건 또 아니었고, 팔로 툭 한 번 쳐 달라고 했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 조금의 고민도 없이 아내를 깨우지 않았다. 나와 노는 게 아닌 이상 아내가 최대한 많이 자는 게, 아내가 가진 기회비용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이다. 물론 내 입장에서.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현관 앞에 쓰레기봉투와 재활용 쓰레기가 보였다. 쓰레기봉투는 꾹꾹 눌러 담으면 하루 정도는 더 쓸 수 있는 상태였다. 욕심(?)을 버리고 쓰레기봉투와 재활용 쓰레기를 챙겨서 나왔다. 오후에 처치홈스쿨 모임을 우리 집에서 한다고 했는데, 그걸 그대로 두면 분명히 아내에게 큰 짐이 될 터였다. 어떤 면에서는 퇴근할 때보다 만사가 귀찮은 출근 시간이지만 재활용 쓰레기장에 가서 분리수거를 하고 쓰레기봉투를 버렸다.


아침에 아이들과 통화를 하고 끊었는데 얼마 안 돼 다시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여보 쓰레기랑 재활용 갖다 버렸네?”

“어”

“와, 대박. 그 아침에? 차에 실어 놨어? 아니면 버렸어?”

“버렸지”

“와, 안 추웠어?”

“어, 금방인데 뭐”

“여보. 고마워. 진짜 생각도 못 했는데”


말 안 해도 알아서 때가 되면 착착착착 버리고 정리하는 인간은 아니다. 그로 인해 아내의 마음에 은근하고 작은 불만이 쌓여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방어가 불가능한 환상적인 움직임으로 그간의 불만을 해소하는 인간에 가깝다. 이게 내가 아내에게 사랑받는 방법이다.


아내는 어제 나의 단정과는 다르게 아침에 장도 보고 왔다고 했다. 그렇게 이른 아침에 걸어서 나간 건 또 오랜만이라, 아내도 애들도 무척 좋았다고 했다. 아침의 상쾌한 공기가 주는 쾌감을 아내와 아이들이 각각 전했다.


오늘도 애들을 재우느라 소중한 밤 시간을 많이 쓰고 나온 아내는, 나와서 식탁에 앉았다. 그냥 앉는 게 아니라 다이어리와 펜, 보조 배터리를 꽂은 휴대폰, 냉장고에서 꺼낸 밀크티, 가장 중요한 빵을 챙겨서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킥킥거리며 웃었더니 나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왜?”

“어? 아니야”

“왜? 비웃는 거야?”

“아니, 누가 뭐라고 했나”

“어이없네”

“그냥 뭔가 여보의 루틴 같아서. 그 모습이”


아내가 지참한 물건 중에 가장 손길을 받지 못하는 게 다이어리다. 뭐랄까. 막 꽃이 피기 시작한 화사하고 생기 넘치는 대학 교정을 거니는 어느 대학생의 겨드랑이에 꽂힌, 손 때가 하나도 안 묻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느낌이랄까. 내 웃음도 사실은 그 다이어리 때문이었다. 어떤 날은 아예 펴 보지도 않을 때도 많다.


맨날 그러는 건 아니다. 아이들 가르칠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날이 더 많…지는 않고 그런 날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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