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23(수)
결혼기념일이었다. 아내가 낮에 장모님에게 갔다가 내 퇴근 시간에 맞춰서 회사 근처로 오기로 했다. 아이들은 장모님과 장인어른께 맡기고. 아주 짧은 시간이기는 해도 아내와 둘이 맛있는 걸 먹으며 데이트를 할 생각이었다. 이미 어제 회사 근처의 괜찮아 보이는 식당 몇 곳을 찾아 놨다.
어제 아내와 내가 자러 들어가기 전에 세 녀석이 모두 깨서 나왔다. 시윤이가 가장 먼저 깼다가 들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윤이와 시윤이가 함께 나왔다. 둘 다 눈물을 글썽였다. 이유가 뭔가 하고 들어 보니, (어제) 소윤이와 시윤이가 자려고 누우면서 ‘엄마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거실로 나오자’고 장난스럽게 약속을 했다는 거다. 어쩌다 보니 깨서 거실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 시윤이는 약속대로 소윤이를 깨웠는데, 소윤이는 잘 자고 있는 걸 깨우는 게 싫었나 보다. 그래서 시윤이한테 짜증을 냈고 시윤이는 그게 서운했고. 시윤이가 서운하다고 우는 건 괜찮았는데 소윤이가 우는 건 뭔가 이상했다. ‘정말 졸렸나 보다’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는데, 뜬금없이 소윤이가 속이 안 좋다면서 토하고 싶다고 했다.
소윤이는 밤새 끙끙거렸다. 약간의 미열도 있었다. 모든 가족이 밤새 한숨도 못 잤다. 나도 최대한 늦게까지 소윤이의 상태를 보고 출근하려고, 맞췄던 알람을 뒤로 늦췄다. 열이 엄청 많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기운이 없었다. 목도 아프다고 했다. 딱 감기 증상이었다. 시국이 시국이니 코로나 검사도 했는데 다행히 음성이었다. 아내가 소윤이 눈 옆에 상처가 났다면서 사진을 찍어서 보내줬는데 뭔가 심상치 않았다. 아내에게 긁혀서 난 상처인지 아니면 뭐가 난 건지 물어봤는데 답장이 없었다.
아무튼 지난 주말에 이어 오늘의 계획도 무산되었다. 아내가 아침에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전화를 드려서 상황을 말씀드렸다. 결혼기념일이고 뭐고 전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아내가. 아파서 엄마 품이 유독 그리운 소윤이의 마음을, 철없는 동생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 엄마 품에 안겨 있는 누나(언니)를 용납하지 못했다. 자기도 엄마 품에 앉겠다며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서로 울고불고 난리인 모양이었다. 아내의 표현에 의하면 ‘2번, 3번이 얄짤없다’고 했다.
병원에 다녀왔는데 목이 많이 부은 건 아니라고 했다. 다만 코가 너무 막혀 있어서 콧물이 목으로 넘어가는 거고, 그게 통증을 유발한다고 했다. 목이 부은 건 아니니 더 아파지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하루 종일 소윤이 상태는 비슷했다. 일단 입맛이 전혀 없었다. 밥도 거의 안 먹었다. 기운도 없었고. 병원에 다녀와서는 세 자녀 모두 낮잠을 자는 일도 벌어졌다. 소윤이는 아파서, 서윤이는 원래 잘 시간이라서, 시윤이는 어제 잠을 너무 설쳐서 피곤했나 보다.
아내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 난 일을 하며 결혼기념일을 준비했다. 준비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그냥 지나치는 건 싫으니 기념이라도 하자는 의미였다. 결혼기념일 당일은 항상 아이들과 함께 축하의 시간을 가졌는데, 이번에는 계획 좌절의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우리(아내와 나)끼리 보내기로 했다. 그래 봐야 애들 재우고 아내와 늦은 저녁 먹는 게 다였다. 평소에 자주 안 먹는 특별한 음식이 기념이라면 기념이었다. 물론 제일 중요한 건 꽃이었다. 꽃도 미리 준비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오후에 잠깐 집에 오셨다. 소윤이 먹을 죽을 만들어 오셨다. 덕분에 아이들은 내가 퇴근하기 전에 이미 저녁을 다 먹었다. 빠르게 잠자리에 드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셋 다 낮잠을 진하게 잤기 때문에 빨리 누웠다고 빨리 잠들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소윤이는 낮잠을 그렇게 자고도 피곤해 했다. 누가 봐도 아픈 사람 같았다. 아까 낮에 아내가 사진으로 보여준 눈 옆의 상처를 자세히 살펴봤다. 역시나 뭔가 이상했다. 소윤이 목덜미 쪽에도 평소에 안 보이던 두드러기가 보였다. 얼마 전에 비슷한 질병(대상포진)을 앓아서 그런지 묘한 촉이 발동됐다.
“소윤아. 옷 한 번 벗어 봐. 아빠가 한 번 보게”
소윤이는 동생들 앞이라 부끄럽다고 했다.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옷을 벗기고 몸을 살펴봤다. 역시나 예상대로 이곳저곳이 불긋하게 솟아 있었다. 두어 군데는 이미 물집이 생긴 상태였다.
“여보. 소윤이 수두 아닌가? 수두 같은데?”
“왜? 많이 났어?”
“어. 그런 거 같아. 나한테 옮은 건가”
아내는 빠르게 이것저것 검색을 해 보더니 ‘수두’를 확신했다. 찾은 정보에서 말하는 잠복기, 발현기와 소윤이의 시기가 비슷하다고 했다. 아무래도 원인 제공자는 나인 듯했다. 갑자기 수두라니. 아내는 이런저런 정보를 더 찾아서 말해줬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수두 예방접종을 했지만 서윤이는 놓쳤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이들이 자러 들어가기 전에 다 함께 거실에 모여서 기도를 했다. 소윤이는 많이 울었다. 왜 울었는지는 모르겠다. 아픈 게 힘들어서 그랬는지 계획되었던 여러 만남이 취소될 게 슬퍼서 그랬는지. 아무튼 많이 울었다. 안쓰러웠다.
사실 수두는 가벼운 병이다(수두인지 아닌지 아직은 모르지만). 아무리 가벼운 병이어도 자녀가 아프고 힘들어하면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계속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다. 신경이 쓰여도, 결혼기념일이었다. 아내가 애들을 재우는 동안 밖에 나가서 음식을 하나 더 찾아왔다. 차에 뒀던 꽃도 가지고 올라왔다. 아내가 나오기 전에 늦은 저녁 겸 결혼 기념 식사를 준비했다. 아내는 생각보다 늦게 나오지는 않았다.
아내는 결혼기념일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는, 참전 용사였다. 결혼을 기념하는 식사라기보다는 전투를 마치고 특별히 마련된 특식을 먹는 용사들의 식사에 가까웠다. 고된 노동 뒤의 끼니는 꿀맛이라더니 마음의 불편함과는 상관없이 맛은 있었다.
“여보. 결혼기념일 축하해. 오늘 고생했네”
“여보도 축하해”
“여보. 내년에 10주년 제대로 하려고 이러나 보다”
“그러게”
계획은 창대했으나 현실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던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이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