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23(수)
병원에 간 아내는 역시나 오늘도 힘들다고 했다. 일단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단지 시간만 길었으면 그나마 좀 나았겠지만 그 긴 시간을 우리 막내가 알차게 채워줬다. 서윤이는 계속 마스크 벗으려고 하고 유모차에 탔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하고. 어떤 모습일지 선명하게 그려졌고 상상만으로도 아내의 힘듦이 전해졌다.
예약한 시간에서 한 시간이 지나서야 진료를 받았다고 했다. 아내와 나의 예상대로 서윤이는 ‘아주 정상’이라고 했다. 감사한 일이다. 1월 첫 주에 겪은 경련 이후로 3개월 만에 완전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끔찍하고 괴로웠던 기억이지만,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아직도 생생한 그때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지금 눈앞에서 웃고 떠드는 서윤이의 존재 자체를 감사하게 된다. 아무튼 이제 서윤이는 뇌파와 관련해서는 병원에 안 가도 된다.
감사와 별개로 아내는 당장 너무 힘들다고 했다. 아이들도 힘들었는지 평소와 다르게 징징거렸고. 얼른 집에 가서 쉬는 게 상책이었다. 진료가 끝나고 나서도 보험 서류를 받으려고 30분을 더 기다렸다고 했다. 모든 일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서윤이도 마스크를 씌워야 한다는 어느 직원에 말에, 한참을 기다렸는데 못 타고 보낸 엘리베이터에, 속이 상해서 울음이 터졌다고 했다. 이럴 때야말로 같이 있기만 해도 힘이 될 텐데, 그러지 못하니 그저 안쓰러웠다.
소윤이는 서글픈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 마음을 썼다.
“엄마. 임종호 커피 같은 곳은 커피가 얼마에여?”
자기가 모은 용돈으로 사 줄 만한 금액인지 가늠해 보려는 의도였다. 정확히 말하면 가늠도 아니다. 소윤이는 자기가 가진 용돈보다 적은 금액이면, 고민 없이 쓴다. 다른 사람 선물 사는 걸 별로 아까워하지 않는다. 후천적인 교육 때문이거나 평판 관리를 위해서 그러는 건 아닌 듯하다. 소윤이의 사랑의 언어가 ‘선물’인 것 같고, 그걸 받고 기뻐할 받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너무 즐겁나 보다. 오늘도 소윤이는 흔쾌히 엄마의 커피는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오늘은 아내가 소윤이의 마음만 잘 받았다고 했다.
아내는 점심으로 만두전골을 먹으러 갔는데, 이게 또 패착이었다. 일단 불친절했다. 친절하지 않은 게 아니라 틱틱거리는 무례함이 느껴졌다고 했다. 뭘 물어보면 단 한 번도 순순히 대답해 주지 않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만두전골이 매워서 아이들이 못 먹을 것 같았으면 음식을 주문할 때 말해 주면 좋았을 것을, 음식을 갖다주면서 조롱하듯
“근데 이거 고추씨가 들어가서 애들 못 먹을 텐데?”
라고 얘기했다고 했다. 아내에게 듣는 동안 내가 열이 다 받았다. 내가 전화해서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꾹 참았다. 어쨌든 음식이 나왔고 아내와 아이들 모두 배도 엄청 고팠으니 어떻게든 먹여 보려고 했다고 했다. 건더기를 물에 담가서 최대한 매운 기를 빼고 줬는데, 소윤이와 시윤이는 맵다고 헥헥거리면서도 먹긴 먹었다. 서윤이에게는 너무 매웠는지 아예 못 먹었다고 했다. 결국 서윤이는 겨우 밥만 먹었다. 아내야 말해서 뭐 하겠나. 그게 코로 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 몰랐을 거다.
“세상이 오늘 안 친절하네. 지금 누가 건드리면 폭발할지도 몰라”
아내가 말하는 폭발은 분노가 아니었다. 아내를 오래 봤지만 분노하는 건 거의 못 봤다(아내 말로는 애들은 맨날 볼 거라고 했다). 아내는 눈물을 말하는 거였다. 잔뜩 부푼 풍선처럼, 톡 건드리면 뻥하고 터질 것 같은 심정이었나 보다.
“여보. 오늘 외출 GO?”
아내에게 자유 부인을 제안했다.
“갑자기 왜?”
“아, 여보 울지 말라고”
아내는 내가 퇴근하기 전에 아이들 저녁을 모두 먹였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탓에 배가 많이 고프기도 했고 서윤이가 낮잠을 안 잤기 때문에 너무 졸려 하기 전에 먹여야 하기도 했다. 내가 저녁을 먹는 동안 세 녀석은 빵을 먹었다. 아내도 저녁을 안 먹고 나갔다. 밖에 나가서 혼자 먹으라고 했다. 얼른 육아 부인의 옷을 벗으라는 뜻이었다.
한 명씩 씻기고 잘 준비를 했다. 서윤이는 엄청 졸려 보였다. 짜증은 하나도 안 냈다. 대신 계속 바당을 뒹굴었다. 앉아 있지를 못했다. 서윤이가 고른 책 한 권, 소윤이와 시윤이가 고른 책 한 권을 읽어줬다. 서윤이는 언니와 오빠가 고른 책을 읽어주는 동안 내 옆에 쪼그리고 누워서 잠들었다. 오늘도 서윤이는 그저 자기만 했는데 아빠와 언니, 오빠의 애정 어린 시선을 듬뿍 받았다.
소윤이가 잠드는 것까지 기다려 주지는 못했다. 한 30여 분 누워 있다가 소윤이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운동하는 시늉 좀 하고 설거지를 하려고 싱크대 앞에 섰는데 방 문이 열렸다. 서윤이 특유의 거침없이 문 여는 소리가 있다. 서윤이는 막 울면서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애매한 보폭과 속도로 나왔다. 엄마하고 안 자는 날은 그 시간쯤에 꼭 깨기로 마음을 먹었나 보다. 거르는 날이 없다. 서윤이를 안아서 진정시키고 다시 방에 눕혔다. 물론 나도 좀 더 누워 있었고.
다시 나와서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소파에 앉았더니 10시가 넘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아직 2시간이나 남은 오늘’이 끝난 것 같은 허망함이 밀려왔다.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짓 아니 생활을 매일 반복하는 아내를 생각했다. 감히 불평과 허망을 거론하기 어려웠다.
영업 가능한 시간이 11시까지니까 당연히 아내도 그 시간이 지나고 올 줄 알았다. 아내는 10시가 조금 넘었을 때, 그러니까 내가 소파에 앉은 지 얼마 안 됐을 때 돌아왔다.
“빨리 왔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카페가 10시까지라서”
“어디 갔는데?”
“나 또 오릴리 도넛 갔다 왔어”
“아, 그랬구나”
“그리고 엄마, 아빠도 또 만났어”
장모님과 통화를 했고, 딸이 혼자 있다는 걸 알게 된 장인어른은 장모님께 얼른 가자고 하셨다고 했다. 나중에 소윤이가 커서 결혼도 하고 따로 사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한테 만나자고 하면, 너무너무 행복하겠다. 상상만 해도 좋다. 아내도 낮의 우울함은 다 떨쳐낸 듯 보였다. 빵빵해서 스치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풍선으로 나갔는데, 몰랑몰랑한 풍선이 되어서 돌아왔다.
매일 수고가 많지만, 오늘은 정말 수고했어. 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