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26(토)
아내는 어제의 약속을 지켰다. 나와 비슷하게 눈을 떴지만 먼저 몸을 일으켜서 거실로 나갔다.
“여보. 좀 더 자”
라는 말을 남기고. 아내의 뜻을 받들어 더 자려고 했는데 더 자지 못했다. 아내가 거실로 나간 뒤에도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방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아예 내 몸 위에 올라타기도 했다. 아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을 거다. 더 자라고 하고서는 일부러 문도 안 잠그고 거실에 나갔을 리가 없다. 아무튼 아내는 약속을 지켰다. 난 한 10분 더 잤다.
점심에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만나기로 했다. 지나간 소윤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만남이었지만 사실 생일은 너무 많이 지나서 큰 의미가 없었다. 그냥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집 근처 중국 음식점에서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있을 때만 나오는 특유의 ‘까불거림’을 장착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카페에도 갔다. 모든 식구가 식당에서 밥을 먹은 것도 오랜만이었지만 카페에 간 건 더 오랜만이었다. 아내는 평소에도 종종 서윤이를 데리고 카페에 가는 걸 제안하곤 한다. 난 만성적 두려움이 생겼는지 ‘서윤이와’ 카페에 가는 건 일단 생각도 안 할 때가 대부분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는데 소망을 품어 볼 만한 상황이 있었다. 서윤이가 아직 낮잠을 자기 전이었다. 점심을 먹고 카페로 옮기는 동안 차에서 잠들 가능성이 컸다.
식당과 카페는 무척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 근처를 두어 바퀴 더 돌았다. 서윤이는 금방 잠들었다. 요즘은 옮기다가 깰 때도 많아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유모차로 옮겼다. 아내에게 옮기라고 했다. 왠지 내가 옮기면 깰 거 같았다. 깨더라도 아내의 손에 책임을 넘기고 싶었다. 다행히 그런 일 없이 서윤이를 무사히 유모차에 옮겼다. 덕분에 서윤이가 깨어 있었다면 가기 어려웠을 분위기의 카페에 한참 앉아 있었다. 다시 차에 탈 때까지, 서윤이는 깨지 않았다. 서윤이는 의아할지도 모른다. 분명히 차에 탔는데 또 차에 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대로 헤어지기 아쉽다는 소윤이와 시윤이의 성화에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잠시 집에도 들르기로 하셨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장인어른의 차를 타고 따로 갔다. 서윤이만 우리 차에 태웠다. 가는 길에 잠시 장을 보느라 장인어른과 장모님, 소윤이와 시윤이가 먼저 집에 도착했다. 우리(아내와 나, 서윤이)도 도착해서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장모님과 소윤이가 도망치듯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소윤이는 신발도 손에 든 채 복도까지 나왔다. 시윤이는 현관 앞에서 옷을 입는 건지 벗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완전하지 않은 착장으로 서둘러서 따라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순간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아내가 시윤이에게 슬쩍 집에 남는 게 어떠냐고 물어봤지만 시윤이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만약 그대로 따돌림을 당하면 무척 속상해 할 것 같았다. 소윤이를 멈춰 세우고 서윤이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어떤 연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득’이나 ‘동의’의 과정 없이, 속도와 속임수로 따돌리는 건 우리 집에서 금지 사항이다.
장모님과 소윤이, 시윤이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돌아왔다. 약국에 들러서 소윤이 수두 흉터에 바를 약도 사고 ‘어린이 종합 영양제’로 포장된 캬라멜도 샀다. 거대한 한 통으로. 오는 길에 놀이터에도 들러서 좀 놀았는지 둘 다 양 볼이 빨갰다. 오전에는 비가 오더니 오후에는 해가 나면서 날이 좀 더웠다.
소윤이는 8살이 된 기념으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큰 용돈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다른 집에서는 초등학교 입학하는 게 꽤 큰일이라 선물도 받고 축하도 받고 그러는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을 하지 않다 보니 그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생략되었다. 가족이나 친척, 가까운 지인들이 잊지 않고 챙겨줬다. 오히려 아내와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무튼 요즘 용돈 모으는 재미를 깨달은 소윤이는, 할머니가 하사한 용돈 중에 얼마나 자기에게 배당(?)이 될지 궁금해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모든 돈은 당연히 아내에게 들어간다. 소윤이의 특별 용돈은 상한선이 정해져 있다. 이번 용돈은 ‘8살 기념’이라는 의미가 있는 만큼 예외적으로 더 큰 금액을 줄 것인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다만 요즘 들어 소윤이가 자꾸 다른 친구의 용돈 금액이나 모은 액수를 자기 것과 비교하며 불평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이걸 한 번 짚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것 또한 금지사항이다. 그게 비교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더욱. 이건 아내와 나도 끊임없이 반성하고 고쳐야 하지만.
아내는 저녁에 약속이 있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가시고 얼마 안 지나서 아내도 나갔다. 아내가 나갈 무렵에 너무 졸렸다. 아내가 나가고 나서 그대로 거실 바닥에 엎드려서 졸았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블록을 하며 놀았다.
‘아, 이제 저녁 먹여야 하는데. 너무 늦어지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졸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꽤 오래 엎드려 있었다.
아이들도 점심을 배부르게 먹어서 배가 많이 고프지 않을 것 같았다. 밥에 고구마와 치즈, 멸치볶음을 넣고 주먹밥을 만들어서 줬다. 시윤이는 얼마 안 먹었는데 소윤이와 서윤이는 생각보다 많이 먹었다. 점심때 시윤이가 탕수육을 엄청 많이 먹긴 했다. 나도 배가 고팠는데 치즈를 넣은 탓에 주먹밥을 같이 먹지는 않았다.
밥을 먹이면서 애들 샤워를 시킬지 말지 아흔아홉 번 정도 고민했다. 씻기는 게 맞긴 했는데 너무 귀찮았다. 다행히 ‘귀찮음’이 더 약해져서 한 명씩 차례대로 샤워를 시켰다. 이제 서윤이도 샴푸 모자를 잘 써서 샤워가 한결 편해졌다. 씻기는 것보다 오래 걸리는 머리 말리기까지 무사히(감정의 소요 없이) 잘 마쳤다.
아내 없는 저녁 시간이 무척 고단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육체의 이야기였다. 마음은 기쁘고 즐거웠다. 특히 서윤이는 언니, 오빠와 잘 놀다가도 한 번씩 아무 이유 없이 내게 와서 안겼다. 여우처럼
“아빠아 주아아”
라고 말하면서. 요즘은 소윤이도 종종 그런다. 시윤이는 곰곰이 생각해 보면 먼저 그러는 일은 잘 없지만, 내가 먼저 부르면 반응은 또 제일 애교가 넘친다. 아빠와 있어도 엄마의 빈자리만 찾지 않고 아빠와의 시간을 충분히 만끽해 주는 자녀들 덕분에 나도 힘들기보다는 행복했다. 서윤이도 제법 경험이 쌓였는지 이제 엄마 없이 자는 것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사실 아예 아무렇지 않았다.
아내는 잘 놀고 들어오면서 전화를 했다. 난 식빵 한 장에 잼을 발라서 먹고 따로 저녁은 먹지 않았다. 아내는 들어오는 길에 뭔가 사 갈 테니 먹고 싶은 걸 말하라고 했다. 난 괜찮으니 그냥 들어오라고 했고. 아내는 그러지 말고 얘기해 보라며 이것저것 제안했다. 떡볶이, 튀김, 순대 등등. 다 괜찮다며 사양하던 내 입술이 ‘햄버거’에서 멈칫했고 아내는 와퍼 세트를 사 왔다.
역시 고된 육아 뒤에 먹는 햄버거는 언제나 맛있기는 무슨 육아는 고되지도 않았고 햄버거는 탱자 탱자 놀면서 먹어도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