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게 빛나는 시절

22.03.28(월)

by 어깨아빠

아내가 사진을 하나 보냈다. 거실 벽에 뭐가 잔뜩 붙은 사진이었다. 얼핏 봐도 애들이 뭔가 만들어서 붙여 놓은 것 같았다. 자세히 확대해서 봤더니 아이들이 만든 일종의 ‘플래카드’였다. ‘엄 마 사 랑 해 요’라고 쓴 종이와 다양한 그림을 그린 종이, 그리고 소윤이와 시윤이가 쓴 편지가 있었다. 시윤이는 자기가 쓸 줄 아는 말을 최대한 표현했다.


“엄마 사랑해요 아까 우리가 엄마 말 잘 않들어서 미안해요 엄마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소윤이의 편지는 감동이었다. 평소에 말로는 자기 생각을 자세히 표현을 안 하기 때문에 더 놀라웠다. 아내도 나도 많이 감동했다. 부족한 부모 밑에서 이렇게 잘 자라고 있는 게 너무 고맙고 감사하기도 했고. 아내는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이 영적으로 자라게 하셨구나 생각하게 됐네. 부족한 엄마의 모습과 부대끼며”


나라고 자유롭지 못하다. 아내가 나 대신 많이 부대껴 주고 있을 뿐이다.


어제 자려고 방에 들어가서 세 녀석을 번갈아 가며 보고 만지면서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진짜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늘 마음에 새기고 있지만, 정말 눈부신 시절이다. 그 눈부심은 아내나 내가 만드는 게 아니다. 순전히 자녀들이 만들어 주는 거다. 눈부시게 빛나는 만큼 부서지듯 흩어지는 기억의 조각들을 최대한 잘 보관해 놓고 싶다. 흐릿해질 기억을 선명한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이놈의 일기도 죽자고 쓰는 거다.


감동이 지나고 나니 아내의 상황을 상상해 봤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그렇게 정성 들여 엄마의 마음을 풀어 주려고 했다는 건, 아내가 그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편지의 내용을 봐도 그렇고. 무엇 때문인지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오늘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쭙잖은 남편의 위로보다 나은 자녀들의 진심이 가득했으니까.


시간이 좀 지나고 오후에 아내가 뜬금없이 카톡을 보냈다.


“여보. 그래놀라 다 먹었구나”


애들 주먹밥 만들어 주고 나니 아내가 먹을 건 너무 조금밖에 안 남아서 요거트에 그래놀라를 넣어서 먹으려고 했는데, 없어서 실망했다는 얘기였다. 아내는 오늘 알았겠지만 그래놀라가 우리 집에서 멸종된 지는 오래됐다. 아내는 그래놀라 대신 서윤이 과자(달달한 딸기 과자)를 넣어서 먹었다고 했다. 내가 아이 키우면서 자괴감이 들었던 순간이 종종 있다.


다 자고 혼자 거실에 남았는데 허기가 진다. 집에 뭐 먹을 게 없나 이곳저곳 살펴보는데 아무것도 없다. 나가서 사 오는 건 너무 귀찮고, 뭔가 먹긴 해야겠고. 뒤졌던 곳을 또 뒤지고 더 깊숙이 뒤지고. 그래도 아무것도 없다. 그때 아이 과자가 눈에 띈다. 아무 맛 안 나는 떡뻥에 비하면 설탕도 약간 들어가서 달달한 맛이 나는 그런 과자. 싱크대 아래 장에 보관된, 이미 개봉해서 조금 먹고 남은 걸 잘 밀봉해 놓은 아이 과자를 보며 먹을지 말지 고민할 때. 이때 갑자기 자괴감이 든다. ‘내가 이걸 꼭 먹어야 하나’ 그렇게 고민하다 결국 꺼내서 먹었을 때, 딱 첫 한 입 먹었을 때, 아까보다 1.5배 정도 더 자괴감이 든다.


아내는 아닌가 보다. 오히려 그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퇴근하고 만난 아내의 모습이 굉장히 힘들어 보였다. 근래 봤던 모습 중에 가장 안 좋아 보였다. 기분이 안 좋은가 싶기도 했다.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될 정도로 뭔가 냉랭하기까지 했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았고 딱히 잘못한 일도 없었다. 그냥 너무 피곤해서 그랬나 보다. 저녁 식탁의 풍경도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가열 조리를 거친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자연 식재료만 있었다. 리틀 포레스트였다. 물론 난 엄청 맛있게 먹었다. 특히 오이고추가 맛있었다. 풋고추와 고추장만 있어도 밥을 먹겠다는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보며, 늙었다는 걸 느꼈다. (+기억 보정 - 생선이 있었다. 맛있는 삼치구이가. 아내가 일기를 보더니 그걸 왜 빼먹냐며 항의했다)


아내는 애들을 재우고 나와서 친구와 통화를 했다. 그러면서 아까보다는 훨씬 생기를 되찾았다. 아내가 통화를 하는데 갑자기 누가 벨을 눌렀다. 화면으로 보니 웬 젊은 여자가 집 앞에 와 있었다. 그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누가 온 건지 놀라서 현관문 쪽으로 가는데 아내가 웃으면서 눈짓을 했다. 그냥 눈짓이었는데 단번에 알아차렸다.


‘여보. 내가 커피 시켰어’


그러고 보니 아내의 운동하는 모습이 어느새 사라졌다. 의지의 희석일까 피로의 확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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