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완성하는 애플 유니버스

22.07.18(월)

by 어깨아빠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홀로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나왔다. 마지막 날이라고 특별히 더 감상에 젖고 그러지는 않았다.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평소와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 스스로가 놀라웠다.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오늘 마지막 출근이네”

“그러게”

“일찍 일어나서 배웅해 줄 걸. 일어나니까 생각이 나네”

“배웅은 뭘. 그냥 나오면 되지”

“그래도. 마지막인데”


지난 금요일까지 모든 업무 인수인계와 정리를 마무리 했다. 공식적인 퇴사일은 7월 말이지만 남은 연차를 소진하려면 오늘이 마지막 근무였다. 점심을 먹고 직원들에게 간단한 선물과 쪽지를 돌린 뒤, 인사를 하고 나왔다. 감정이 요동치고 그러지는 않았다. 감사한 마음이 제일 컸고, 약간의 두려운 마음도 여전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이 결정은 미래의 나에게 과연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궁금하기도 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아마도 일찍 퇴근하지 않을까’라고만 얘기했고, 퇴근하면서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평소보다 네 시간 정도 이른 시간에 집에 돌아왔다. 당분간 없을, 영원한 퇴근이랄까.


“어? 여보?”

“아빠아아아악”


아내와 아이들은 약간의 놀람과 기쁨으로 날 맞이했다. 장모님도 와 계셨다. 장모님과 친한 권사님도 함께 계셨다. 아내의 냉장고 정리를 돕기 위해서 특별히 출동하신 거였다. 냉장실과 냉동실에 오랫동안 묵혀 뒀던 각종 음식과 재료(즉, 동결처리 된 음식쓰레기)를 커다란 대야에 모으고 계셨다. 굉장히 어수선했다.


소윤이는 식탁에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중간에 아내에게 가서 귓속말로 뭔가를 묻고 대답을 듣기도 했다. 마지막 출근을 한 아빠를 위해 뭔가를 만들거나 쓰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물론 모르는 척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아내와 아이들이 작은 방으로 사라졌다.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티가 많이 났다. 뭘 하려고 그러는지는 몰라도.


잠시 후 아내와 아이들이 입에는 ‘불면 뿌뿌 소리가 나면서 말려 있던 비닐이 펴지는’ 걸 물고, 손에는 풍선을 들고 나왔다. 자기들도 웃겼는지 막 웃으면서. 난장판이었다. 이미 너무 많이 불어서 소리는 다 새어 나갔고 풍선을 흔들기는 했지만 정형화 되거나 약속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나도 재밌었다. 사실 뿌듯하고 흐뭇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아빠 힘내세요’ 노래도 불렀다. 웃음 반 노래 반이라 감동적이지는 않았지만 즐거웠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편지를 선물로 준비했다. 읽는 순간에도 기분이 좋았지만 아주 먼 훗날 이 편지를 다시 읽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고 흐뭇하고 아련할지 상상이 되는 그런 편지였다. 이 순간을 통째로 저장하고 싶었다. 아내도 선물을 준비했다. 작은 종이 가방을 들고 오면서


“엄청 깜짝 놀랄 걸?”


이라면서 나의 만족을 장담했다. 종이 가방 안에는 에어팟이 들어 있었다. 나의 애플 유니버스는 전적으로 아내가 조성해 가고 있으며, 거의 다 완성이 됐다.


“여보. 퇴사 또 해야겠는데?”


아이들의 편지와 축하(라기 보다는 환대라고 표현하는 게 맞으려나)에 감히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내 손과 눈과 귀는 자꾸 아내가 선물한 에어팟을 떠나지 못했다.


장모님과 권사님은 계속 냉장고 정리에 박차를 가하셨다. 몇 번이나 음식 쓰레기를 버리고 오기도 하셨다. 아내는 거의 손을 뗀 상태였고 장모님과 권사님이 전담하셨다. 그 결과, 냉장고가 텅텅 비었다. 속이 다 후련했다.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지만, 5인 가족인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아내와 내가 언제나 ‘정리된 공간’을 갈망하지만, 사실 욕구만큼 부지런하지도 않다.


장모님과 권사님을 모셔다 드리고 오는 길에 여러 곳을 들렀다. 우선 백화점에 들렀다. 아내가 볼 일을 보는 동안 난 아이들을 데리고 지하 식당가로 갔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적당한 음식을 몇 개 제시해 주고 뭘 먹고 싶냐고 물어봤더니 소윤이는 뚝배기 불고기, 시윤이는 수제비를 골랐다. 귀가 밝은 서윤이는 언니, 오빠와 아빠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자기도 뭘 먹고 싶다고 종알종알 얘기했다.


“아, 그래? 알았어. 서윤아”


라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뭘 말하는지 정확히 듣지 못했다. 사실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평소에도 가끔 이럴 때가 있다.


“어, 그래 알았어. 서윤아. 그랬어?”


라고 대답하면 소윤이나 시윤이가


“아빠. 서윤이 뭐라고 한 거에여?”


라고 물어본다. 그럼 이렇게 대답한다.


“몰라. 아빠도 그냥 대답한 거야”


서윤아, 미안.


음식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전혀 기대가 없었고 그저 한 끼 때우려고 했는데 의외로 맛있었다. 아내도 볼 일을 마치고 내려왔고 아내와 내가 먹을 것도 샀다. 아이 셋을 데리고 밖에서 밥 먹는 걸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나 내가 새삼 대단했고, 언제 어디서나 웬만하면 잘 먹는 아이들도 새삼 기특했다.


잠시 쇼핑몰에도 들렀다. 들러야 할 곳이 한 곳 더 남아서 굉장히 서둘렀다. 안타깝게도 쇼핑몰에서는 우리의 생각대로 일을 진행하지 못했다. 가구 쇼핑몰도 가야 했다. 가구 쇼핑몰이 문을 닫기 전에 가려고 서둘렀는데, 이미 마감을 했다고 했다. 우리가 시간을 잘못 알았다. 저녁 시간을 꽉꽉 채워서 부지런히 움직인 것에 비하면 별로 진행된 게 없어서 다소 허탈했다.


집에 와서 애들 씻기고 눕혔더니 열 시가 넘었다.


“여보. 정상적으로 퇴근했을 때보다 더 피곤한 거 같네?”


그래도 내일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어색하면서도 좋았다. 알람 없는 아침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