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09(금)
장인어른도 오셨다. 아침 일찍 출발하셔서 점심시간쯤 도착하셨다. 내가 퇴근할 무렵에는 카페라고 했다. 나도 거기로 갔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소윤이는 시무룩했고 아내도 왠지 모르게 저기압이었다. 아이들도 아내도 피곤할 시간이어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평소라면 그런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계시는데도 그런 분위기인 게 어색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유가 있었다. 요약하자면 아내가 서윤이 몫으로 따로 챙겨 놓은 에그타르트가 있었는데 그걸 소윤이가 먹은 거다. 자기가 찾아서 먹은 건 아니었고 할머니가 먹으라고 준 거였다. 소윤이는 이미 자기가 먹을 몫을 받아서 먹은 뒤였다. 아내는 동생 몫으로 떼어 놓은 걸 소윤이가 임의로 탈취(?)한 줄 알고 몇 마디를 했는데, 소윤이는 거기에 마음이 상했다. 아내도 나중에 사정을 들어보니 조금 민망했다고 했다. 하긴, 소윤이가 식탐을 부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기 걸 떼어서 나눠주면 나눠줬지. 아무튼 그래서 뭔가 이상했던 거다.
소윤이는 저녁에 월남쌈이 먹고 싶다고 했다. 이사 오기 전에 종종 갔던 맛있는 월남쌈 가게가 그리웠지만, 아직 그만한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아예 시도를 안 했다. 소윤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데 한참 동안 먹지를 못 했던 거다. 소윤이는 오늘 저녁으로 월남쌈을 먹고 싶어 했다. 첫째 손주의 바람을 어떻게든 들어주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었다. 끌리는 곳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월남쌈을 강하게 원하는 소윤이, 기왕 갈 거면 좀 제대로 된 곳에 가고 싶으니 오늘은 일단 다른 걸 먹고 싶지만 굽히지 않는 소윤이 때문에 억지로 월남쌈 가게를 찾는 아내, 손주의 희망을 꺾고 싶지 않은 할머니 사이의 끝없는 의견 교환이 일어났다. 자주 겪는 상황이었다. 의외로 사람을 축축 처지게 하는 시간이라 난 아예 빠졌다.
긴 논의(?) 끝에 월남쌈은 다음에 가기로 했다. 이 곳에서 찾지 못하면 언젠가 경기도에 올라갔을 때 예전에 가던 곳을 꼭 한 번 가기로 했다. 월남쌈을 먹지 못하게 된 소윤이가 많이 속상해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날도 있지만 소윤이는 대체로 크게 마음을 쓰지 않고 넘기는 편이다. 정작 오늘은 카페 바로 옆에 있는, 부모님들과 갔던 칼국수 가게로 갔다. 거기도 훌륭했다. 항상 만족하는 곳이다.
밥을 먹고 집에 올 때, 아내는 장모님과 함께 장을 보고 오겠다고 했다. 나와 장인어른이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집에 왔다. 아내는 자기가 장을 보고 와서 아이들을 씻기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빨리 올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아이들 셋을 다 씻겼다. 샤워를 한 게 좀 돼서 샤워를 해 줬다. 막 준비하려고 하는데 서윤이가 다급하게 날 부르며 말했다.
“아빠아. 똥 마려워여어어”
오줌도 아니고 똥이라니. 번개처럼 서윤이의 팬티와 바지를 벗기고 변기에 앉혔다. 차도가 없는 배변 훈련에 아내도 나도 지쳐가고 있었는데, 굉장히 반가운 외침이었다. 반가움이 무색할 만큼 빠르게 서윤이가 다시 날 불렀다.
“아빠아. 똥이 안 나와여어어”
조금 더 앉혀 놓기도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이때부터는 알고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가 된다. 서윤이가 ‘똥이 마렵다’라고 한 건 분명히 변의를 느낀 거다. 결과물 획득에 실패했지만 ‘곧’ 결과물이 분출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아니 큰 게 아니라 분명히 그렇게 된다. 그때는 서윤이가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그대로 팬티와의 만남이다. 당연히 오늘도 한 치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조금 다른 게 있었다. 내가 소윤이를 씻기고 있을 때 그 일이 벌어진 거다. 장인어른이 서윤이를 안방 화장실에 데리고 가서 씻기셨다. 엄청난 손주 사랑이면서 장인어른의 실전 육아력이 얼마나 높은지 확인 가능한 대목이었다.
역시나 아내와 장모님은 꽤 시간을 쓰고 돌아왔다. 미리 씻겨 놓길 잘했다. 아이들을 눕히고 잠들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오징어와 과자를 먹으면서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주된 주제는 ‘손주들의 탁월함’, ‘안쓰러운 손주들’ 등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눈에는 손주들이 너무 뛰어나고 특출나면서, 하고 싶은 걸 너무 못해서 안쓰러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