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로운 딸

22.12.27(화)

by 어깨아빠

어제 자기 전에 서윤이에게 단호하게 얘기했다.


“서윤아. 오늘은 엄마, 아빠 사이로 올라오지 마. 알았지? 자다가 깨도 서윤이 자리에서 자”


약간의 울먹거림과 함께 ‘네’라고 대답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서윤이는 안방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맨 바닥에 맨 몸으로. 옷을 두 겹이나 입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추워 보였다. 내가 덥던 두꺼운 이불을 덮어주고 방에서 나왔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아빠 마음 약해지라고.


시윤이는 아침에는 또 기운이 살짝 없었다고 했다. 밥도 조금밖에 안 먹었고. 오후에는 기운을 차리기는 했지만 밥은 조금만 먹었다고 했다. 퇴근했을 때는 완전히 멀쩡해 보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까불고 촐랑거렸다. 다만 밥은 여전히 조금밖에 안 먹었다. 장모님이 사 주신 소고기를 구웠는데 정말 조금 먹었다. 처음 떠 준 한 그릇(그마저도 양이 적었다)만 딱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히려 소윤이는 고기가 다 없어질 때까지 앉아서 먹었다. 요즘은 다른 사람들이 소윤이를 먹는 걸 보면 놀란다. 몸만 보면 그렇게 많이 먹을 거라고는 상상을 못하나 보다.


요즘 소윤이는 자기 전에 엉덩이를 닦아 달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샤워를 안 하는 날에는 조금 찝찝함을 느껴서 그럴 거다. 아내와 나는 대체로 매우 힘겨운 듯 반응한다. 더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매우 귀찮아 할 때가 많다. 너무 피곤할 때는 ‘오늘은 그냥 자면 안 되냐’라고도 하고. 소윤이는 엄청 조심스럽게, 애교를 가득 섞어 물어볼 때가 많다. 소윤이는 원래 애교가 많은 자녀가 아니다. 아내와 나의 반응이 예상이 되니까 자기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엄마와 아빠의 눈치를 살펴 가며 얘기하는 거다. 오늘도 비슷했다.


아내는 지나고 나면 그게 너무 미안하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저께였나. 자려고 누웠던 소윤이가 다시 나와서 엉덩이를 닦아 달라고 했을 때는 화가 났다. 화가 난 건 물론이고 다소 화를 ‘내기도’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너무 기분이 좋지만, 그와 동시에 갑자기 피로가 막 쏟아진다. 오히려 밖에서 일을 할 때는 그 정도로 피곤을 느끼지 않는다. 집에 오면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 건지 항상 고비가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아주 작은 귀찮음에도 크게 반응할 때가 많다. 소윤이의 요청은 귀찮아 할 일이 아니고 오히려 내가 먼저 챙겨서 꼬박꼬박 해야 할 일인데.


어제도 사과 할 일이 있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작은방을 봤는데 책상 위에 시윤이 색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 책상 위에 아이들이 자꾸 뭔가를 쌓아 두길래(정리를 하지 않고 대충 던져 놓길래) 그렇게 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었다. 정리하지 않은 물건은 갖다 버리겠다며 엄포도 놓고.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에게 말했다.


“강소윤, 강시윤. 아빠가 여기에다 아무거나 막 던져 놓지 말랬지? 제 자리에 정리 안 해요?”


색종이의 주인은 시윤이였다. 시윤이는 색종이를 받아들고 색종이 둘 곳을 찾았다. 아내는 앉아 있던 소윤이에게 ‘오늘 정리 진짜 열심히 했는데 저걸 못 봤나 보다’라며 가볍게 이야기를 건네고 다시 주방으로 갔다.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방이 엄청 깨끗했다. 정말 그 색종이 하나만 책상 위에 있었고, 나머지 공간은 아주 깔끔했다. 아내의 말처럼 소윤이와 시윤이가 나름대로 열심히 정리를 했다는 게 느껴졌다. 바로 후회가 됐다.


‘이렇게 잘 한 건 보지도 못하고 칭찬도 안 하면서 그깟 색종이 하나 보였다고 바로 지적질을 하다니’


바쁘게 육아 퇴근을 향해 달리다 보니 다시 이야기를 꺼내고 사과할 틈이 없었다. 아이들 잘 때 쪽지라도 쓸까 싶었는데 그것도 못했다. 마침 오늘 소윤이가 자다 깨서 아내와 내가 있는 방으로 왔다. 아내와 나도 자려고 막 누운 참이었다. 아내가 먼저 소윤이에게 ‘엉덩이’ 얘기를 하며 사과를 했다. 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소윤이를 내 옆으로 끌어당기고 안으면서 어제의 일과 오늘의 일을 모두 사과했다. 착하고 마음이 넓은 소윤이는 괜찮다면서 웃어줬다.


내일은 더 자비로운 아빠로 살기 위해 노력해 봐야겠다고 다짐을 하다가 생각을 고쳐 먹었다.


자비는 부족하고 잘못하는 걸 받아주고 이해하는 거다. 소윤이는 잘못이 없었다. 자기 혼자 잘 못하니까 도움을 요청한 것뿐이다. 그 요청을 매몰차게 걷어찬 건 나다.


자비는 내가 베풀 게 아니라 소윤이가 나에게 베푸는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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