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치는 냉각수와 아내의 마음

23.01.02(월)

by 어깨아빠

시윤이가 먼저 깨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시윤이는 2층에 있는 소윤이를 깨웠다. 소윤이의 대답이 의외였다.


“왜 이렇게 늦게 깨웠어”

“아니야 누나. 나도 일어나자마자 바로 깨운 거야”


소윤이와 시윤이가 방에서 나가고 나서 시계를 보니 5시 58분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안방에 있는 아내를 깨운 뒤에 서윤이 옆에서 자던 나도 깨웠다. 어제 짐을 다 쌌기 때문에 크게 바쁠 건 없었다. 부지런히 옷만 갈아입고 출발하면 됐다. ‘몇 시쯤 출발할 예정이니?’라는 부모님들의 질문에 ‘일곱 시 전에 출발하는 게 목표’라고 답했는데, 목표를 달성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다는 것에 들뜬 소윤이와 시윤이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서윤이도 마찬가지였다. 내내 시끄럽게 떠들고 찬양도 부르고 웃고 그랬다. 평일이라 차도 안 막혔다. 쉬지 않고 200km 가까이 움직였다. 아이들하고 가는 거니까 내비게이션이 알려 주는 시간보다 조금 더 늦어질 줄 알았는데, 잘 하면 예상 시간 그대로 도착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갑자기 경보음이 들렸다.


“삑, 삑, 삑, 삑”


계기판에 빨간 경고등이 켜져 있었다. 냉각수 경고등이었다.


‘아, 저 놈의 냉각수’


며칠 전에도 같은 증상이 있어서 카센터에 갔지만 제대로 원인을 찾지 못했고, 그 뒤에는 괜찮아서 그냥 탔다. 하필 고속도로 한 가운데서 다시 경고를 날린 거다. 아내와 나는 물론이고 아이들까지 모두 혼란에 빠졌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축제였던 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멀지 않은 곳에 졸음쉼터가 있어서 급히 차를 세우고 잠시 마음을 정돈했다. 정돈이 잘 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 지 궁리를 하며 휴대폰으로 대처 방법도 찾아봤다. 한 10분 정도 기다렸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차에 시동을 켜고 출발했다.


“삑, 삑, 삑, 삑”


바로 또 경고등이 울렸다. 이미 졸음쉼터에서는 나왔고 휴게소는 먼 거리에 있었다. 갓길에 차를 대고 보닛을 열었다. 엔진도 식히고 아내와 나의 머리와 마음도 식힐 겸 다시 기다렸다. 조금 있으니 고속도로 순찰대가 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고속도로 순찰대는 우리 차 뒤에 알림용 고깔을 세워두고 떠났다. 아내와 나는 여전히 어찌 할 바를 결정하지 못했다. 보험사에 연락해서 근처 카센터까지 견인을 요청하기에는 ‘근처’에 있는 곳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운전을 해서 가장 가까운 카센터로 가는 방법, 한참 시간을 두고 기다린 다음 조심스럽게 운전을 해서 남은 거리(거기가 딱 중간쯤이었고, 한 2시간 정도 더 가야 했다)를 가는 방법 정도가 우리의 선택지였다. 어떻게 해야 할 지 신속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게”


한 30-40분을 충분히 식히고 다시 시동을 걸고 서서히 차를 움직여 봤다.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통성기도를 시작했다. 아내에 비해서 나는 다소 평안한 상태였다. 어떻게 해야 할 지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을 뿐, 마음이 막 요동치고 우울하고 그런 건 아니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남에게 빌린 초고급 세단을 운전하듯 천천히 가속 페달을 밟았다. 출발하자마자 다시 끝을 향해 오르던 냉각수 온도 바늘이 조금씩 내려오더니 딱 가운데 멈췄다. 무사히 부모님 집까지 갔다. 감사했다. 일단 거기까지 무사히 온 것만으로도.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도착하자마자 할머니에게, 오면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느라 바빴다. 점심을 먹고 나서 부모님 집 근처의 카센터에 가 보기로 했다. 내 운동화도 사러 가야 했다. 나 혼자 다녀오려고 했다. 나야 당연히 아내와 함께 가면 좋지만, 도착하자마자 아이 셋을 엄마에게 내팽개치고 가는 게 죄송스러워서 혼자 가려고 했다.


“가영이랑 같이 가”


엄마는 괜찮다면서 ‘쟤네가 힘들게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떠냐’면서 함께 다녀오라고 했다. 진심으로 죄송스러워서 거절했다. 딱 두어 번만. 못 이기는 척 아내와 함께 손을 잡고 나왔다. 일단 차부터 맡겼다. 차를 맡기고 쇼핑몰에 가서 운동화를 샀다. 장거리 운전을, 그것도 마음고생을 동반한 장거리 운전을 막 마치고 온 거라 행색이 영 초췌했지만 그래도 데이트 기분이 났다. 목적 이외의 다른 걸 하지는 않았다. 차 고치고, 운동화 사고 바로 돌아왔다. 차는 무사히 고쳤다(내려갈 때 문제가 없어야 진정한 확인이 되겠지만).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당연히 잘 놀고 있었다. (내) 엄마가 특별히 더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손주 셋을 함께 볼 때의 기본적인 체력 소모 이외의 추가적인 정신적, 육체적 소모는 없었던 듯했다. 집에 가니 졸렸다. 나도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아내가 좀 잤다. 난 거실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뭘 하지는 않았다. 엄마가 다 했다. 아이들과 윷놀이를 했다. 힘들지는 않았고 오히려 재밌었다. 아내가 깨고 윷놀이가 끝나니 다시 졸음이 짙어졌다. 슬쩍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웠다. 잔 건 아니었지만 약간 졸았다. 퇴근하고 오신 아빠의 소리에 잠에서 깼다. 저녁으로 다 함께 치킨을 먹었고, 아이들은 엄마가 재웠다. 아, 그 전에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에 아빠가 손주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신다고 해서 나갔다 왔다. 아내는 설거지라도 하겠다며 주방에 섰다가 (내) 엄마의 강력한 보디체킹으로 밀려났다.


과정은 험난했으나 과정을 견딘 이후에는 먹고, 자고, 쉬고를 반복하는 안빈낙도의 휴가 첫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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