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은 많고 시간은 짧고

23.01.04(수)

by 어깨아빠

소윤이는 오늘도 출근하는 할아버지를 배웅하려고 일어났지만, 할머니의 강력한 만류로 방 안에서 나가지 못하고 다시 잤다고 했다. 서윤이는 나와 아내와 함께 잤다. 아침에 바깥에서 언니와 오빠의 소리가 들리니 엄마를 채근해서 나가자고 했다. 아마 서윤이가 먼저 나갔던 것 같다. 그 다음에 아내가 나갔고 난 가장 늦게 나갔다. 일어난 뒤에도 한 시간 정도 그냥 누워 있었다. 휴대폰을 보면서.


오늘은 또 거처를 옮겨야 했다. 집을 떠나서도 잘 곳이 많다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여러 곳에서 잠을 자는 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다. 짐을 여러 번 쌌다 푸는 것도 마찬가지고. 점심을 먹고 짐을 싸서 나왔다. 소윤이는 할머니와 고모에게 줄넘기 하는 걸 꼭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짐은 미리 차에 싣고 잠깐 놀이터에 갔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줄넘기는 핑계에 불과했다. 줄넘기 하는 건 한 3분 보여주고 끝이었다. 줄넘기를 끝내고 나서는 놀이터에서 놀기 바빴다. 생각보다는 따뜻했지만 그래도 겨울 날씨였다. 금방 볼이 빨개지고 콧물이 흐르는 날씨였다. 이동을 해야 하니 마냥 놀기도 어려웠고. 할머니와 고모, 사촌 동생과 헤어지는 게 퍽 아쉬웠겠지만 아직 많은 여정이 남은 게 위로가 됐을 거다. ‘언제 또 보냐’는 말이 과장의 표현이 아닌, 정말 언제 또 볼 지 모르는 이별이었다.


“할머니양 헤어지니까 속당해여어. 아쉽다아”


차가 출발하자 서윤이가 한 말이었다. 주워 들은 표현을 활용했지만, 감정만큼은 자기의 것이었다. 자녀들은 찰떡같이 안다. 누가 자기를 사랑하는 존재인지. 아무리 오랜만이어도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자리는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이유다. 어쩌면 표현을 그것밖에 못해서 그렇지, 훨씬 더 큰 아쉬움과 섭섭함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이사 오기 전에 함께 처치홈스쿨을 했던 지인의 집에서 자기로 했다. 가는 길에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아파트에 들렀다. 차를 타고 단지 안을 한 바퀴 돌았다. 근처 상가도 돌고. 어제도 있었던 곳인 듯하다가도 엄청 오래 전에 살던 곳인 듯 아득한 기분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랬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이런 게 생겼네, 그건 없어졌네’라며 여기저기 둘러봤다.


지인의 집에는 저녁 먹을 시간 즈음에 도착했다. 막내(이자 넷째)가 이제 갓 100일을 넘긴 터라 왠지 모를 분주함(혹은 비상대기)이 느껴졌다. 5개월 만의 만남이었지만 어색함은 없었다. 어른이나 아이나. 아이들은 금세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놀았고 어른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눴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한참 동안 수다의 시간이 이어졌다.


오랜만의 만남인 만큼 아이들끼리 자도록 허락했다. 소윤이와 시윤이, 지인의 첫째와 둘째와 셋째가 한 방에서 잤다. 서윤이는 엄마 옆에서 자겠다고 했다. 아내와 지인의 아내가 각각 막내를 재우는 동안 남편들은 식탁에 앉아서 아내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내들은 막내를 재우는 방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나왔고 그게 자정 무렵이었다. 아이들(막내를 제외한)은 아직도 안 잤다.


어른들의 수다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시를 넘어 두 시 무렵에도 방에서 소리가 들렸다. 날이 날이니 만큼 그냥 뒀다. 마치 어른들처럼, 쌓인 회포를 풀기에는 하룻밤이 모자랄 테니까. 두 시 반 쯤 시윤이가 어른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다들 잠들어서 혼자 남았다고 했다. 기분이 이상했나 보다. 실컷 떠들다 혼자 남은 게. 다시 올라간 지 얼마 안 돼서 또 내려왔다. 어른들 옆에서 자다가 아빠(나)가 자는 방에서 함께 자겠냐고 물어봤는데 그건 또 싫다고 했다. 엄마 옆이었으면 아마 바로 수락했겠지만 아내가 자는 방에는 각 집의 막내, 특히 지인의 막내가 자고 있어서 함께 자는 건 어려웠다. 시윤이는 갈등하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어른들은 세 시 반 쯤 각자 정해진 자리에 누웠다. 과연 내일 일정을 정상적으로 소화하는 게 가능할 지 의문이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후회 없는 수다의 시간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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