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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Apr 05. 2023

오랜만에, 우리끼리 명절

23.01.20(금)

부모님과 가까이(같은 수도권에) 살았을 때는 명절이 별로 명절 같지 않았다. 평소에도 자주 보니 명절의 만남이라고 더 특별할 건 없었다. 오히려 이번 명절이 더 명절처럼 느껴졌다. 명절이지만 가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니 더 그랬다. 이제 연휴의 첫 날(공식 연휴는 아니었지만, 나와 K는 오늘부터 쉬었다)이었는데도 벌써 그랬다.


아침에 엄청 늦게까지 잤다.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눈이 떠져서 꽤 한참 동안 휴대폰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다시 잠들었는데 열 시 반까지 잤다. 아내도 나도. 세 남매는 엄마와 아빠를 깨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이렇게 얘기했다.


“엄마, 아빠. 너무 배가 고파여”


휴일의 특혜를 제대로 누린 엄마와 아빠 덕분에 늦은 아침 정도가 아니라 이른 점심이 첫 끼니가 됐다.


시장에 구경을 가기로 했다. 명절에 어울리는 ‘무언가’를 생각하다 결정했다. 아내나 나는 물론이고 아이들도 시장 구경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시내 쪽에 제법 규모가 큰 시장이 있어서 거기를 가기로 했다. 나가기 전에 기온을 봤는데 영상이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나갔는데 모든 게 예상 밖이었다. 우선 날씨가 생각보다 추웠다. 꽤 추웠다. 그나마 아이들은 따뜻하게 입혀서 다행이었다. 내가 너무 춥게 입었다. 시장에 사람도 생각보다 많았다. 그래서 오히려 재밌었다. 명절 분위기가 났다. 정말 아무 목적 없이 시장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면서 구경했다. 그러다 호떡도 사 먹고, 만두도 사 먹고, 약밥도 사 먹고, 뻥튀기도 사 먹었다.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서 어디 서서 먹는 건 어려웠고 시장 한 편에 마련된 야외 쉼터에 앉아서 먹었다. 먹성 좋은 내 자녀들은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끼 참새처럼 연신 입을 벌려대며


“엄마. 아”


를 외쳤다. 아내는 여기저기 부지런히 만두와 호떡을 넣어줬다.


다음 목적지는 공원이었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세운 계획이었다. 소윤이는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싶어 했고, 시윤이는 딱히 원하는 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공을 찰 곳이 있으면 됐다. 서윤이도 컸다고 목소리를 냈다.


“아빠. 더는 끽보드 타고 디퍼여어”


야외에서 놀 수 있는 건 바리바리 다 챙겼는데, 예상 외로 날씨가 쌀쌀했다. 아니 쌀쌀한 걸 넘어서 부들부들 떨게 만드는 날씨였다. 일단 공원으로 가기는 했다. 거기서 K네 식구도 만나기로 했다. K의 아내는 치과에 다녀오느라 없었고, 일단 K와 그의 자녀들만 만났다.


햇볕이 있는 곳에 가면 좀 나을까 싶어서 갔는데 처음 10초 정도는


“오. 그래도 볕 아래 있으니까 따뜻하네”


라는 말이 나왔지만, 곧


“근데 바람 부니까 춥긴 춥다. 오래 있기는 힘들겠다”


는 말로 바뀌었다. 공원 안에 있는 놀이터에 갔는데 거기는 너무 그늘이었다. 잠깐이라도 볕을 쐴 곳이 없었다. 조금 더 걸어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공터로 갔다. 소윤이는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싶어 했는데, 내가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상 오늘은 안 타는 게 어떻겠냐는 의미였다). 우리 가족끼리 가는 거면 얼마든지 타도 괜찮았지만, K네 가족을 만났고 K의 첫째는 인라인스케이트를 챙겨 오지 않았으니 혼자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건 적당한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K네 식구와 만나기로 결정한 뒤로는 소윤이에게 미리 여러 번 얘기했다. 그래도 소윤이는 서운했는지 바로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상황에 항상 울음을 먼저 터뜨리는 소윤이를 보면 왠지 모르게 화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윤이의 감정을 먼저 공감해 주는 날이 있는가 하면 오늘처럼 되려 매몰차게 반응하는 날도 적지 않다. 소윤이에게 막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럼 인라인스케이트 타라’면서 매우 차갑게 반응했다. 결국 아내가 소윤이를 데리고 가서 따로 얘기를 했다. 얘기라기 보다는 소윤이의 마음을 읽어줬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거다.


오래 놀지는 않았다. 여전히 추웠다. 공원 안에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아이만 여섯이라 다소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손님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아이들이 앉아서 책을 읽을 만한 공간도 따로 있었다. K의 아내도 여기서 합류했다.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 둘 책을 펴고 앉았다. 서윤이와 K의 막내가 다소 부산스럽기는 했지만 나머지 아이들은 매우 조용하게 책만 읽었다. 덕분에 의외로(?) 어른들도 꽤 긴 시간 앉아서 차분히 대화를 나누는 게 가능했다.


저녁도 함께 먹고 K네 가족은 집으로 가고 우리는 교회로 갔다. 하루 종일 찬 바람을 맞고 난 뒤 배를 두둑하게 채우니 몸이 노곤했지만 그래도 의지를 내서 갔다. 역시 인생이 의지만으로 되는 건 아니었다. 금요철야’기도회’인데 기도는 못하고 계속 정신을 잃었다. 아내는 의외로(?)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기도를 했다. 아이들 셋을 데리고 먼저 1층으로 내려왔다. 눈만 감으면 잠들어서 기도는 못해도, 기도하는 아내의 방해요소를 모두 제거(?)해 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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