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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May 29. 2023

30분 후에 깨워 줘

23.01.23(월)

서윤이는 여전히 안 좋았다. 어제 그렇게 잠든 후로 깨지는 않았지만, 아침에도 여전히 기운은 없었고 열도 났다. 어제처럼 높은 열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몸 상태가 아주 좋지는 않았지만 어제 자기 전처럼 안 좋은 것도 아니었다.


서윤이가 어느 정도 회복했기 때문에 간병인 역할은 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가사 전담인의 역할을 매우 강렬하게 수행했다. 매 끼니 차려서 먹이는 건 기본이었다. 어묵탕, 기름떡볶이, 야채볶음밥, 깍두기 볶음밥 등을 만들었다. 매번 설거지를 했다. 모아서 식기세척기에 넣지 않고 그냥 바로 바로 했다. 싱크대에 그릇이 쌓이는 걸 보기가 싫었다. 오늘도 먹고 치우고 차리고의 반복이었다. 마치 무한 순환인 것처럼.


아내는 많이 잤다. 아침에도 늦게 일어났는데 낮에도 많이 잤다. 내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에 자녀들에게


“30분 있다 깨워 줘”


라고 말하고 방으로 들어간 아내는 세 시간 삼십 분을 자고 나왔다. 중간에 서윤이도 낮잠을 재웠는데 서윤이와 함께 나왔다. 아무튼 엄청 많이 잤다. 부모님 집에 갔을 때도 이렇게 잔 적이 없었다. 많이 피곤했나 보다.


아내가 자는 사이 난 잔뜩 쌓인 빨래도 돌리고 건조기에 있던 옷은 갰다. 서윤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괜찮아졌다. 빨래를 갤 때는 자기도 거들겠다면서 옆에 앉았다. 서윤이는 진심을 다해 빨래를 갰지만, 결과물은 엉망진창이었다.


“아빠. 더 달 개뎌어?”


라고 말하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딸에게 ‘그렇긴 한데 도움이 하나도 안 되네. 그냥 좀 다른 거 하겠니?’라고 차마 말하기 어려웠다. 서윤이가 보지 않을 때 얼른 서윤이가 갰던 걸 다시 펴서 갰다. 소윤이 정도면 실제로 큰 도움이 되지만, 서윤이는 아직 멀었다. 돕지 않는 게 가장 큰 도움이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오늘도 자기들끼리 잘 놀았다. 물론 나도 수시로 아이들의 요구에 응하며 보드게임과 빙고를 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자기들끼리 알아서 잘 놀았다. 덕분에 나도 가사에 전념하는 게 가능했다.


“여보. 괜찮아? 너무 미안하네”

“나? 괜찮은데?”


아내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나를 걱정했다. 깨지 않고 잔 자신의 처신(?)에 미안해 하면서. 몸이나 마음이나 전혀 힘들지 않았다. 다만, 설거지를 다 하고 나면 나도 모르게 식탁에 앉아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때가 몇 번 있기는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답답해 했다. 그럴 만했다. 아내도 답답해 했다. 그럴 만했다. 아내를 생각하면 아내도 함께 나가고 싶었지만 서윤이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서윤이가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밖에 데리고 나가는 건 좀 무리였다. 소윤이와 시윤이만 데리고 나가기로 했다. 서윤이가 너무 서운해 하면 어쩌나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잘 받아들였다. 물론 나가고 싶어 했지만 자기 상황을 잘 아는지


“서윤아. 대신 서윤이 선물 사 올게. 뭐 사 올까?”


라는 물음에 금방 태도를 바꾸고 골똘히 생각했다.


“꾸끼. 꾸끼 사 두데여어”


쿠키를 사 오기로 약속하고 소윤이와 시윤이와 함께 집에서 나왔다. 한 시간 넘게 걸었다. 바닷가를 따라서 쭉 걷고 돌아올 때는 도로 쪽으로 걸었다. 그냥 걷기만 했지만 아이들에게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도 속이 다 후련한 밤 산책이었다. 아프고 지친 동생과 엄마를 위해, 각자의 영역에서 나름대로 고군분투 한 세 명을 위한 위로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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