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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Jul 18. 2023

다 서로 위한다고

23.02.17(금)

“아빠. 불이 안 켜져여”


정전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꽤 오래, 그러니까 아내와 내가 막 잠들었을 무렵부터 그랬던 것 같았다. 식기세척기의 그릇과 세탁기의 빨랫감이 그대로였다. 냉장고부터 확인을 했다. 다행히도 냉기가 빠져 나가지는 않아서 다 녹고 그런 건 아니었다. 김치냉장고의 김치는 좀 쉬었을지도 모르지만.


출근하고 얼마 안 됐을 때 아내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우는 목소리였다. 내가 나가고 나서도 한 번 더 정전이 됐다고 했다. 아내의 평정심이 무너졌나 보다. 특별히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제시할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디 아내가 감정을 얼른 추스르길 바랄 뿐이었다. 아내도 나에게 뭘 기대하고 전화한 건 아니었을 거다. 한 시간 쯤 지나고 걱정이 돼서 괜찮냐고 물어봤더니 괜찮다고 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하루 종일 집에 있다가 교회로 왔다. 나도 교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K네 식구와 교회에서 저녁을 먹고 금요철야예배도 드리기로 했다. 아내가 김치찌개를 끓여서 오겠다고 했다. 아내는 나에게 집으로 올 거냐고 물어봤다. 교회에서 저녁을 먹고 예배를 드리기로 했으니 난 계속 교회에 있으면 됐다. 아내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물어본 건 ‘집에 와 줄 수 있냐’는 의미였다.


“내가 가면 도와줄 게 있나?”

“응. 그냥 존재 자체?”


아내는 통화 말미에 ‘안 와도 된다’고 하면서 ‘육아력’을 발휘할 준비를 했다. 일을 마치고 아내에게 다시 전화를 했는데 그 때는 준비가 거의 끝났다고 했다. 그냥 교회에 있기로 했다. 아내는 여러 모로 힘겨워 보였다. 우선 전기가 또 두 번이나 나갔다고 했다. 안 그래도 바쁘게 찌개를 끓이고 있는데 전기까지 나갔으니 몸도 마음도 바쁘고 혼란스러웠을 거다. 아내는 밥과 김치찌개를 비롯한 짐을 양 손 가득 들고 등장했다.


“여보. 고생했지?”

“괜찮아”


아내 덕분에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서윤이는 낮잠을 늦게 잤는지 예배 시간 내내 안 잤고, 졸려 보이지도 않았다. 교회에서는 절대로 누워서 자지 않는 시윤이는, 아내에게 기대서 잠들었다. 내가 기도를 먼저 마쳤다. 소윤이와 서윤이를 데리고 먼저 1층으로 내려왔다. 소윤이는 K의 자녀들과 얼마 없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알차게 놀았다. 기도를 마친 아내는 잠든 시윤이를 안고 1층까지 내려왔다. 시윤이는 눈을 뜨고 있었다.


자녀들을 모두 씻겨서 눕히고 아내와 소파에 앉아서 각자 휴대폰을 보며 잠시 방전의 시간을 가졌다. 난 샤워도 하고 일기도 써야 해서 먼저 일어났고, 아내는 한참을 더 그렇게 있었다. 아내는 자정이 넘어서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마다 피곤하고 졸려서 일어나기 어려우면 잠이라도 일찍 자는 게 맞다. 게다가 아이들이 먼저 일어나서 엄마가 깨는 걸 기다리는 게 아침 육아의 질을 좌우한다는 건 아내가 먼저 얘기했다. 아이들보다 먼저 일어나서 아이들을 맞이하는 아침과는 천지 차이라는 거다. 해야 할 일이 있었으면 소파에서의 시간을 줄이고 조금 더 빨리 움직였어야 했다. 얼른 자야 할 시간에 뭔가 하겠다고 하지 말고 차라리 조금이라도 일찍 자는 게 좋겠다’


이게 내 생각이었다.


“빨리 좀 자지. 지금 그걸 하고 있어”

“아니. 시간이 없으니까”

“시간이 없긴 뭐가 없어”


금기를 건드렸다. 육아하는 아내에게 ‘시간 많잖아’ 식의 이야기는 별로 좋을 게 없다. 좋을 게 없는 정도가 아니라 메마른 낙엽에 떨어지는 불꽃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육아를 끝내고 비로소 한가로이 여유를 즐기는 시간이 많았다고 할 지라도. 역시나 아내도 그 말이 귀와 마음에 거슬렸는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불이 붙지는 않았다. 나도 피했고, 아내도 캐묻지 않고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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