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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Mar 10. 2024

아내가 있지만, 아내의 빈 자리

23.08.30(수)

아내의 입덧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 듯했다. 문제는 그 절정이 어디쯤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는 거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매우 힘들었다’는 느낌이 남아있는, 이전 세 번의 경험 덕분에


‘드디어 시작인가’

‘언제까지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든 여정이 시작됐다.


출근하기 전에 마침 아이들도 모두 일어나서, 당부의 말을 전하고 나왔다.


‘지금 엄마가 매우 힘든 상태다. 그러니 너희가 엄마를 잘 도와줘야 한다. 엄마를 도와주는 건 다른 게 아니다. 엄마를 안 힘들게 하면 되는데, 엄마가 언제 가장 힘들겠냐. 너희가 말을 안 듣고 서로 다툴 때 가장 힘들다. 그러니 엄마를 도와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 다투지 않고 엄마 말씀 잘 듣는 거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이 상투적인 메시지를 ‘그래도 엄마가 임신한 걸 알고 있고 입덧 때문에 괴롭다는 걸 아니까 조금은 무게감 있게 듣겠지’라는 기대감과 함께 설파했다. 단 한 번이라도 떠올리며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자제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


아내는 오후가 되도록 아무것도 못 먹고 물만 조금 먹다가 애들 점심으로 주고 남은 비빔국수를 조금 먹었는데 바로 격렬한 반응이 왔다고 했다. 하루 종일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누워 있기만 했다. 아내가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 있으니 아이들도 영향을 받았다. 아무 데도 나가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집에서도 엄마의 손길이 덜 미친 티가 났다고나 할까. 괜히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퇴근하고 아이들을 마주하니 왠지 모를 애잔함이 느껴졌다. 아이들이 우울하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가지 못하는 에너지를 집에서라도 발산하려는 듯 난리를 치며 놀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문구점에 가야 했다. 목공풀, 양면테이프, 풀을 사야 한다고 했다. 퇴근길에 사 와도 된다고 했는데, 일부러 문구점에 안 들렀다. 저녁 먹고 가면 그 핑계로 아이들도 잠깐 밖에 나가서 바람을 쐴 수 있으니까.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던, 앞으로도 며칠은 그래야 할 것 같은 아이들을 위한 나름대로의 배려 아닌 배려랄까.


저녁은 집 근처 중국음식점에 가서 먹었다. 아내는 도저히 저녁을 준비할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도 모르고 퇴근하기 전에 속없이


“점심을 두 시에 먹어서 저녁 서두르지 않아도 돼”


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한 끼도 제대로 못 먹고 한 순간도 제정신을 차리기 힘든 사람에게.


아내가 정상이 아니다 보니 육아는 물론이고 집안일도 그대로 중지 상태였다. 가족 누구라도 빈자리는 크게 티가 나겠지만, 아내의 빈자리는 유독 더 그렇다. 엄마로서의 빈자리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손길이 닿지 못한 이런저런 일들을 내가 대신 맡아서 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오늘이 본격적인 첫날이었는데, 마치 열흘은 보낸 듯한 피로감이 들이닥쳤다.


아내는 밥다운 밥은 거의 못 먹었다. 요거트를 먹은 게 다였다. 그렇게 안 먹었는데도 입덧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당연한 얘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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