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02(토)
축구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죽 가게에 들렀다. 아내가 죽이라도 먹어봐야겠다고 하면서 사다 달라고 했다. 많이 먹지는 못했고, 아주 조금 먹었다. 역시나 살기 위해서.
아이들은 오늘은 벼르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입덧 덕분에 아이들도 제대로 된 외출을 하지 못한 한 주였다. 아이들은 아빠가 쉬는 주말만 기다렸고, 나도 ‘주말에 아빠랑 재밌게 놀면 되니까 조금만 참아’라는 말을 많이 했다. 무조건 나가서 아이들의 억눌린 욕구를 풀어줘야 했다.
그렇다고 만사를 제쳐두고 놀기만 해서는 안 되는 주말이기도 했다. 매일 쳐내야 하는 집안일 말고 주말에 ‘시간과 마음을 들여야’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예를 들면, 화장실 청소나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쓸고 닦는 청소 같은 일이다. 다른 건 몰라도 화장실 청소는 오늘의 숙원사업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시각적으로도, 후각적으로도 인상을 쓰게 만드는 요소가 여럿 보였다. 아내보다 몇 배는 더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내가 느낄 정도였으면, 아내는 아마 진작부터 ‘아, 화장실 청소…’ 라는 생각을 했을 거다. 아내의 입덧 때문에 수반되는 고생을 감당하는 남편을 생각해 말을 안 했을 뿐.
아이들은 ‘언제 나갈까’가 초미의 관심사였지만, 나는 일단 할 일은 해 놔야 하는 입장이었다. 화장실 청소가 아니더라도 아내의 빈 자리를 채우려면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집안 곳곳을 평균 이상의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체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내 나름대로 과업이라고 생각한 일을 모두 마친 뒤에 ‘드디어’ 아이들과 나왔다.
제일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소윤이는 자전거, 시윤이는 축구나 자전거, 서윤이는 킥보드를 얘기했다. 조금 좁기는 하지만, 걸어서 갈 수 있는(코 앞에 있는) 작은 공원에 가기로 했다. 가장 기세 좋던 무더위는 한풀 꺾인 터라,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엄청 힘든 날씨는 아니었다. 나에게는 어쩌면 ‘야외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더 부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정말 오랜만에 자전거와 킥보드를 가지고 공원으로 갔다.
아침을 조금 늦고 배부르게 먹은 탓에 따로 점심을 먹지는 않았다. 공원 바로 옆에 있는 빵 가게에서 빵을 조금 사서 나눠줬다. 적어도 놀 때 만큼은 엄마의 빈자리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무려 3시간 넘게 쉬지 않고 놀았다. 사실 동네 공원이라 정말 자그마하기 때문에 할 것도 별로 없었을 텐데 의외로 오래 유지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자전거, 서윤이는 킥보드를 타고 공원을 빙빙 돌고 있었는데 나름대로 상황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연출은 소윤이의 몫이었다.
“시윤아 냉! 냉!”
“누나, 알았어!”
도대체 ‘냉’이 뭔가 주의 깊게 들어보니, 냉각수의 약어였다.
“시윤아, 냉 냉 이러면 냉각수가 끓은 거니까 멈춰야 돼”
소윤이가 우리 집에서 첫째라고 해도 고작 아홉 살이다. 아홉 살 짜리 입에서 ‘냉각수가 끓는 거야’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웃기지만, 일곱 살 짜리 동생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게 더 웃겼다. 얼마 전 처분한 차에서 몇 번이나 발생한 문제였다. 역시나 자녀들은 사는 대로 배우는구나.
3시간 넘게 놀았다. 아이들은 지겨워 하지도 지치지도 않고 놀았다. 나에게도 그다지 힘든 시간은 아니었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잘 놀아준 덕분에 난 평상에 누워서 여유롭게 ‘본부’의 역할만 했다. 그마저도 특별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에 더 수월했다. 가끔 물과 빵을 먹으러 오는 아이들을 대응하면 됐다.
실컷 놀고 나니 배가 고프다고 했다. 저녁으로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봤는데 소윤이가 떡볶이를 얘기했다. 간장 떡볶이를 해 주겠다고 했더니 소윤이는 매운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했다. 시윤이도 매운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는 했지만 소윤이만큼 잘 먹지는 못하기 때문에 간장 떡볶이도 필요했다. 서윤이도 먹어야 했고. 결국 둘 다 만들기로 했다. 야채와 소시지 면 사리를 넣고 두 가지 종류의 떡볶이를 만들었다. 매운 떡볶이는 고춧가루만 넣고 만드느라 고춧가루를 꽤 많이 넣었는데 내가 먹기에도 많이 칼칼했다. 아이들이 전혀 못 먹을까 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꿋꿋하게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학학’ 소리를 내면서도 매운 떡볶이로 향하는 젓가락질을 멈추지 못했다.
“하악. 아빠. 매운데 너무 맛있어여. 하악”
아내는 당연히 먹지 못했다. 먹기는커녕 우리가 먹는 동안에도 내내 침대에 누워서 사투를 벌였다. 아내 없는 육아 일상을 소화하는 게 결코 녹록하지 않지만, 하루 종일 숙취 혹은 멀미를 앓는 것과 비슷하다는 입덧으로 고생하는 아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아내를 생각한다.
아이들을 모두 눕히고 난 뒤에는 차를 끌고 세차장으로 갔다. 차를 사고 처음 세차인 만큼 꽤 공을 들였는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태라 겨우겨우 끝마쳤다.
불태웠다. 여러 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