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2(수)
아내는 오전에 성경 공부가 있었다. 원래 지난주 수요일에 첫 시작이었는데 깜빡 잊었다. 그야말로 새까맣게 잊고 가지 못했다. 평소에는 애들 때문에 엄두도 못 내던 걸 출산하기 전에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을 이용해 야심 차게 신청한 건데 그렇게 되니 매우 허탈했다. 오늘은 잊지 않고 반드시 참석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아침 10시까지 가야 했으니 아내는 꽤 일찍부터 서둘렀다. 아내의 성경 공부는 두 시간 정도 걸렸고 집에 오니 1시쯤 됐다. 아내 없이 보낸 세 시간 동안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주 잘 있었다. 난 작은방에서 내 할 일을 했는데 거의 거실에 나갈 일이 없을 정도로 자기들끼리 시간을 보냈다. 한참 자석 블록을 하고 놀다가 다른 걸 할 때는 소윤이의 주도 아래 알아서 블록도 정리하고. 너무 아이들하고 놀지 않는 건가 하는 찜찜한 마음이 잠시 생기기도 했지만 같이 놀자고 요청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끼리 실컷 웃고 떠들며 노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돌아왔을 때 딱 점심시간이었다. 소윤이는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고 싶다고 했다. 아내가 대승적으로 외식을 결정한 덕분에 집 근처 중국요리집에 가기로 했다. 난 부리나케 설거지를 시작했다. 아침 먹고 미뤄둔 거였다. 아내가 올 때까지 그대로 두는 건 부부의 도에 어긋나는 일이니 오기 전에 마치려고 했다. 아내는 설거지가 끝나기 전에 도착했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도 아침에 일어난 그대로라 옷도 갈아입고 꼬질꼬질한 자태도 좀 다듬어야 했다. 아내는 나갔다 왔으니 그대로 다시 나가면 되고, 애들도 아내가 옷을 갈아입혔다. 나만 준비가 되면 바로 출발하려고 했다. 양치를 하고 있는데 아내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 어머님이네?"
(내) 엄마와 통화를 하는 아내의 대화를 들어보니 대략 무슨 내용인지 알 듯했다.
"엄마 오신대?"
"어. 오늘 일 없으시다고 오신대. 출발하시자마자 연락하신 거래"
"아, 그래?"
"그래서 점심은 그냥 우리끼리 간단히 먹고 저녁에 장가계 가자고 하시네"
"그래야겠다 그럼"
갑작스러운, 예고 없는 시어머니의 방문. 굉장히 껄끄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나의 아내는 그럴 리 없겠지만, '그럴 리 없다', '절대', '무조건' 과 같은 단정적인 생각이 많아지면 위험한 것이니 아내에게 한 번 더 물었다.
"여보. 엄마 갑자기 오셔도 괜찮아?"
"나? 나야 좋지"
"그래? 진짜?"
"응. 집이 좀 더러운 게 걸리긴 하지만"
"집이야 뭐. 이 정도면 깨끗하지"
소윤이는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을 시간이 더 미뤄졌다는 것이 좀 슬프긴 했지만 미뤄졌을 뿐이었다. 거기에 탕수육 100그릇을 준대도 환산이 안 될 할머니가 오실 테고.(그 정도는 아닌가?)
점심은 냉동실에 있던 만두로 대신했다. 장모님이 주고 가신 거라 몰랐는데 맵디매운 김치만두였다. 시윤이는 당연히 못 먹었고 소윤이도 한 입 먹더니 눈이 붉게 차올랐다.
"하아. 하아. 아빠. 맵다여"
소윤이도 이제 맛이라는 걸 알아서 매워도 먹고 싶은 욕망이 발현되나 보다. 매우면 그만 먹으라고 해도 조금만 더 먹겠다더니 결국 두 개를 못 먹고 손을 들었다. 지난번에 먹고 남은 카스텔라가 있어서 그걸 줬다. 끼니라고 하지는 못해도 우유랑 함께 먹으면 어느 정도 허기는 달래진다.
곧 (내) 엄마가 오셨고 아내와 나는 자유를 얻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이것저것 제약하는 게 많은 엄마와 아빠의 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거기에 요즘은 자기들끼리 잘 논다는 이유로 엄마와 아빠가 함께 놀아주는 시간이 좀 적었는데 할머니는 아니었다.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였다. 저녁 먹으러 가기 전까지 할머니는 손주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저녁도 잘 먹고 왔다. 언제나처럼 시윤이는 탕수육에, 소윤이는 짜장면에 집중했다. 집에 돌아와서 할머니랑 놀아야 하는 소윤이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할머니와의 이별이 다가온다는 걸 느낀 거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내가 먼저 엄마에게 주무시고 가라는 제안을 했던 거 같다. 내가 내일 엄마네 집 근처에 갈 일이 있으니 하루 자고 나와 함께 차를 타고 편히 가라는 뜻이었다. 보통은 "자고 가긴, 가야지" 이런 식의 반응이 나올 텐데 엄마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 엄마가 진짜 자고 갈 생각도 있구나'
아내가 재차 권하고, 소윤이까지 가세했다. 엄마는 일단 아빠에게 전화를 해보겠다고 했지만, 아빠가 그러지 말라고 할 것 같지도 않았고 설령 그렇다 해도 엄마가 자고 가겠다고 하면 막을 노릇도 없었다. 혹시나 나의 권면이 없으면 뭔가 껄끄러워서 그러는 것으로 오해할까 봐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엄마. 자고 내일 나랑 같이 가면 되겠네"
엄마는 하루 자고 가기로 했다. 가장 신난 사람은 소윤이었다.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울산에서 소윤이가 태어난 날 이후 부모님이 우리 집에서 자는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소윤이도 기대하지 않았을 거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라고 생각하다가 현실이 되니 정말 토끼눈이 되었다.
신기했다. 평소 같으면 며느리 불편할까 봐 단박에 거절했을 엄마의 이례적인 결정도, 시어머니가 자고 가는 게 아무렇지 않은 아내도. 어디 가서 자랑을 늘어놓을 만큼 효자도 아니고, 좋은 사위는 더더욱 아닌 내가 나의 공로는 별로 없이 고부 갈등에서 자유로운 결혼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게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성격 좋은 며느리와 깨어 있는 시어머니 모두에게 감사를.
소윤이와 시윤이는 엄마, 아빠와는 다른 할머니와 아주 진탕 놀았다. 자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요구를 원 없이 들어주며 기꺼이 기쁘고 즐겁게, 함께 노는 할머니가 같이 자기까지 한다니 얼마나 신났을까. 심지어 할머니는 자기 전에 읽어주는 책도 각각 두 권씩 고르도록 했다. (평소에 엄마, 아빠는 둘이 합쳐 한 권을 고르라고 할 때도 종종 있다.)
아내와 엄마가 함께 소윤이와 시윤이를 재우러 들어갔다. 조금 지나고 아내가 혼자 나왔다.
"왜?"
"쫓겨났어"
"응?"
"소윤이가 나가래. 할머니랑 자겠다고"
"시윤이는?"
"바로 잠들었지"
평소에는 그렇게 엄마 못 잡아서 안달이더니 이렇게 쉽게 내팽개치다니.
엄마는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소윤이가 나왔다. 화장실로 가서 오줌을 쌌는데 소리가 아주 짧았다. 별로 마렵지 않았는데 괜히 나왔다는 증거였다. 소윤이를 불러서 아무리 할머니랑 자더라도 계속 장난을 치면 안 된다고 얘기했다. 소윤이는 '빨리 할머니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표정으로 나의 막간 훈계를 들었다. 소윤이가 다시 방에 들어가고 나서도 꽤 시간이 지나서야 엄마가 나왔다.
한참 수다를 떨다가 새벽 2시가 다 되어서 방에 들어갔다. 엄마는 소윤이와 시윤이 사이에 눕고 나와 아내는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