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9(토)
아내는 어제 자기 전에 소윤이와 시윤이의 아침을 모두 차려놨다. 평소처럼 밥을 차려 놓은 건 아니었고 소윤이가 먹고 싶어 하던 대만 샌드위치와 우유, 삶은 계란, 과일 등을 준비했다. 앉아서 먹기만 할 정도로 준비를 해 놓은 건 아니었고 약간의 수고가 필요했다. 우유는 냉장고에서 꺼낸다든지, 바나나는 껍질을 까야 한다든지, 통에 담긴 과일과 계란을 나눠야 한다든지. 소윤이에게는 이 모든 과정을 주도하고 완수해야 하는 책임도 주어졌다. 아내는 소윤이를 위해 편지를 겸한 짤막한 매뉴얼도 적어서 식탁에 올려놨다.
요즘 아침에 둘이 먼저 일어나서 꽤 오래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놀기도 잘 놀고 가끔은 눈에 보이는 걸 알아서 잘 나눠 먹기도 하고. 과연 주어진 임무를 정확히 완수하는 것도 가능한지 궁금했다. 어려울 건 없어 보이지만 그건 어른의 시선이고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아마 생소한 경험이었을 거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7시에 일어났다. 아내와 나는 서로 잠에서 깬 걸 눈치챘지만 자는 척했다. 둘이 앉아서 이런저런 대화를 좀 나누더니 (지금이 밤인지 새벽인지, 거실에 나갈 건지 더 누워있을 건지) 거실로 나갔다. 아내와 나는 애들이 나가자마자 눈을 뜨고 웃음을 교환했다. 문을 꽉 닫고 나가서 정확히 듣기는 어려웠지만 소윤이와 시윤이의 놀라는(즐거워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식탁 위에 펼쳐진 평소와 다른 풍경, 그러나 뭔가 먹을 게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한 시윤이와 엄마의 편지를 보고 상황을 조금씩 이해하는 소윤이의 반응이 달랐다. 소윤이는 하나하나 친절하게 의미와 과정을 설명했다. 너무 나가보고 싶었는데 그러면 애초에 아내와 내가 의도했던 '자율성'이 훼손될까 봐 꾹 참았다.
갑자기 책임자가 되어서 이것저것 챙기는 소윤이에게 '얼른 기도하고 먹자'라며 보채는 시윤이의 소리가 들렸다.
"누나아. 기도 언제 하꺼야아앙"
"잠깐만. 기다려 봐"
"누나. 이거 간식이니까 기도 안 해도 대나아앙?"
"시윤아. 이게 간식이 아니라 아침이야. 밥은 아닌데 아침이야"
"아, 그대에?"
"어. 이걸 아침으로 먹는 거야. 알았지"
"누나아. 이제 기도하고 먹으까아?"
"잠깐만"
마침내 소윤이의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때쯤 아내가 화장실을 핑계로 잠시 나갔다. 아내가 들어오고 나서 나도 슬쩍 나갔다. 내가 그렇게 봐서 그런지 몰라도 시윤이는 그저 자기 앞에 놓인 샌드위치 먹느라 정신이 없었고 소윤이는 동생을 챙기는데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소윤이는 자기 샌드위치는 까지도 않고 있었다. (물론 맛있는 건 아껴먹는 소윤이의 습관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소윤이는 기특했고, 시윤이는 동생 같았다.
"소윤아 맛있게 먹어. 시윤이는 누나 말 잘 듣고. 알았지?"
"네"
다시 방에 들어와서 누웠다. 아내는 금방 다시 잠들었고 난 한참 동안 눈을 뜬 채로 누워 있다가 잠들었다. 덕분에 난 해가 한가운데 떴을 때 다시 일어났다. 아내에게 들어보니 소윤이와 시윤이는 '엄마, 아빠 없이 아침 식사 해결하기' 과제(?)를 거의 완벽하게 수행했다.
오늘도 내내 집에만 있다가 오후에 잠깐 나갔다 왔다. 저번처럼 킥보드를 가지고 나갔다. 소윤이가 놀이터에서 너무 놀고 싶다길래 딱 5분만 놀기로 하고 갔다. 단 사람이 많으면 놀지 못한다고 미리 얘기했다. 사람은 없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신나게 그네를 탔다. 말은 5분이라고 했지만 진짜 지키기 위한 5분은 아니었다. 그만큼 '잠깐' 놀 거라는 걸 일러주기 위한 거였다.
10여 분 지나고 나니 아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빠랑 함께 나왔다가 아빠는 어딘가 가고 자기들끼리 남은 자매가 있었다. 소윤이가 그들과 마주치더니 인사를 건네고 나이를 물었다. 우리나라는 애고 어른이고 나이 묻는 걸 참 좋아한다. 자매의 언니는 9살, 동생은 6살이었다.
"우리 같이 놀까?"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숨바꼭질을 한다고 했다. 잠시 앉아서 쉬려고 아내 옆에 앉아서 지켜보는데 갑자기 자매의 언니가 자기는 그네를 탈 거라면서 그네로 갔다. 동생도 따라갔다. 소윤이는 '뭐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봤고. 소윤이는 다시 나에게 와서 술래잡기를 하자고 했다. 소윤이, 시윤이와 재밌게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데 아까 그 자매가 곁에 와 있었다.
"우리도 같이 놀래요"
'놀아요' 가 아니라 '놀래요'였다. 우리 쪽 혹은 나의 의사를 묻는 건 아니었다. 자기의 결정을 알리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도 예의가 없거나 되바라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 같이 놀자"
내가 제일 못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런 거다. 전혀 관계가 없는, 생면부지의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주는 것. 이걸 못한다. 키즈 카페나 놀이터에 가면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 난 주로 애들을 방치하지 않고 같이 노는 편이기 때문에 엄마, 아빠 없이 노는 아이들 중에 붙임성 좋은 녀석들이 붙는 경우가 생긴다. 난 싫다. 내 애들이나 내가 좋아하는 애들, 좋아하지 않더라도 아주 조금이나마 관계가 있는 애들하고는 얼마든지 열과 성을 쏟아서 놀 수 있는데 그게 아니면 힘들다. 오늘도 마찬가지였지만 처치홈스쿨의 정신을 되뇌며 기꺼이 움직였다.
숨바꼭질을 하는데 첫판에 내가 술래였다. 뒤로 돌아서 열심히 '꼭꼭 숨어라'를 외치고 있는데 9살짜리 언니가 내 뒤에 와서 숨었다. 아마 '술래 바로 뒤에 숨어 있는 건 설마 예상도 못 하고 찾겠다고 뒤돌아섰는데 자기가 있으면 엄청 깜짝 놀라겠지'라고 생각하며 그랬겠지. 아니나 다를까 뒤를 돌았더니 킥킥대며 자기는 아까부터 여기 숨어있었다고 얘기했다.
"아, 그랬구나"
미안하다. 삼 아니 아저씨가 널 몰라. 나머지 애들도 제대로 숨지도 않았다. 그냥 애들끼리 놀라고 하고 좀 쉬어야겠다 싶어서 다시 아내 옆에 앉았다. 그랬더니 조금 있다가 또 9살짜리 여자아이가 어딘가에서 나오더니 얘기했다.
"저 여기 숨어 있었는데 몰랐어여?"
"아, 너 숨어 있었구나. 어, 몰랐네"
갑자기 애들이 점점 많아지길래 소윤이와 시윤이를 불러들였다.
"소윤아, 시윤아. 이제 가자. 동네 한 바퀴 돌러 가자"
그 자매도 아빠가 다시 왔다.
그야말로 동네 산책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킥보드 라이딩이었고. 잠시 한살림에 들렀을 때 과자 한 봉지를 사줬다. 각각 한 봉지가 아니라 둘이 한 봉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행복해했다.
"아빠. 언제 먹어여?"
"이따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맛있겠다"
엄청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놀이터에서도 좀 놀고 한살림, 빵집 등도 들르고 중간에 애들 화장실도 가고 그래서 또 엄청 짧은 것도 아니었다. 요즘 같은 일상에는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외출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시국이 어떤지 알고 이 정도의 외출에도 충분히 만족할 줄 알게 됐다.
소윤이가 저녁을 먹으며 얘기했다.
"아빠. 오늘 아침 너무 맛있었어여"
맛도 맛이지만 뭔가 뿌듯함이 느껴졌다. 앞으로 종종 이용해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