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외박

20.06.20(토)

by 어깨아빠

오늘 고모(내 동생)네를 가기로 했다. 그것도 아침 먹고 부지런히. 게다가 하루 자고 오기까지. 고모와 고모부를 자주 만나는 건 아니지만 만날 때마다 잘 해주기도 하고, 어쨌든 가족 프리미엄이라는 게 있기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는 자주 가서 잤지만 고모, 고모부 집에서는 처음으로 자는 거니까 그것도 설레는 듯하고.


아무튼 소윤이와 시윤이는 이미 어제부터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품었다.


"아빠. 고모네 집에 가면 놀이터도 있고 바닥 분수 있져? 그것도 있대여. 그리고 화장실에 욕조도 있대여"


신이 나서 나한테 얘기했다. 어디 여행 가는 애처럼.


"아빠. 우리 언제 고모네 갈 거에여?"


소윤이와 시윤이는 둘이 돌림 노래로 쉼 없이 물어봤다. 안 그래도 (내) 엄마와 얘기하기를 아침만 각자 간단히 해결하고 점심 전에 가기로 했다. 아침도 시리얼로 간단히 먹으려고 준비해 뒀는데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그것도 긴 기다림이었나 보다.


"아빠. 시리얼 빨리 먹고 가자여"

"아빠아. 빠이 가고 디퍼여엉"


원래 예상했던 시간보다 1시간 늦긴 했지만 그래도 11시에 집에서 출발했다. 짐이 정말 여행 가는 것처럼 트렁크에 한가득이었다. 자전거에 킥보드에 유모차에 이불까지.


소윤이와 시윤이에게(사실 거의 소윤이를 향해)는 가기 전에 미리 주의(혹은 엄포)를 줬다. 할머니, 할아버지만 만나면 지나치게 버릇이 없어지고 막 말하고 행동하는 걸 좀 막기 위해서.


"소윤아. 할머니, 할아버지 만났다고 해서 버릇없게 하거나 하면 안 되는 행동들 하면 안 돼? 알았지? 서윤이 안아주지 말라고 고집부리거나 그러지 말고. 만약에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오늘 안 자고 그냥 올 거야. 알았지?"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정말 돌아갈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할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돌아올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혹시 소윤이도 나의 엄포가 공갈이라는 걸 간파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긴 했다. 그래도 뭐 진짜 공갈, 협박이 아니라 좋은 말과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부드러운 제안이었으니까.


도착하고 얼마 안 돼서 바로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족발과 순대볶음, 묵사발. 철저히 어른들의 메뉴였을 뿐만 아니라 시댁 중심의 음식이었다. 그토록 맛있는 걸 찾아 헤매는 아내의 입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대표 요리 두 가지였다 족발과 순대볶음. (내) 엄마와 동생은 아내를 위해 다른 음식을 시키겠다고 했지만 아내는 한사코 만류했다.


순대볶음은 나의 추억의 음식 중 하나다. 신림동에서 자랐기 때문에 순대볶음이라는 건 언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결혼하고 다른 지역에 살아보니 순대볶음 특히 빽순대(하얀 순대볶음)는 흔한 음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가끔 먹고 싶어도 파는 곳이 없으니 그리워하기만 했는데 마침 등장한 거다. 아내가 족발과 순대볶음 사이에서 어쩌고 있는지를 별로 신경 쓰지 못하고 정신없이 순대볶음을 먹었다.


서윤이는 역시나 식사를 시작하자 울음을 터뜨렸지만 안아줄 사람이 많았던 덕분에 내가 내내 안고 있지는 않았다. 아내는 "가영아, 별로 못 먹었지?", "언니, 먹을 게 없었죠?" 라는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걱정에


"아니에요. 그래도 먹을 만하던데요. 많이 먹었어요"


라고 대답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빽순대에 코를 박고 먹느라 아내의 말이 어느 정도 진실인지 정말 모르겠다. 추측하건대 먹을 만했다는 건 못 먹을 정도는 아니라는 말일 거고, 많이 먹었다는 건 배를 채울 정도로는 먹었다는 말일 거고. 감춰진 결론까지 예상하자면 [그래도 막 먹고 싶거나 굳이 사 먹지는 않지] 였을 거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주 잘 먹었다. 각자 뭘 잘 먹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잘 먹었다. 시윤이는 바로 옆에 앉아서 좀 봤는데 순대를 제법 잘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똑같이 잘 먹는 후손을 바라볼 때의 그 뿌듯함이란. (좋은 대학은 필요 없지만 맛있는 식당에는 함께 가자)


고모네 집에 오기 전에는 "고모네 집에 언제 가냐"고 끊임없이 물었다면 도착하고 나서는 "언제 바닥 분수에 가서 노냐"고 계속 질문했다. 점심을 먹자마자 나갔다. 아내만 빼고 모두.


"여보. 좀 쉬어. 서윤이도 데리고 나갈 테니까. 좀 자"

"그래. 가영아 좀 자"

"언니. 한숨 자요"


아무도 없는, 내 집도 아닌 시누이 집에 누워서 혼자 자는 게 아내에게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내 느낌에 대한민국 평균보다 훨씬 시댁과 시댁 식구들을 불편해하지 않는 아내에게도 힘든 일인지는 모르겠다. 어떻게 선택을 하든 그건 아내의 몫이고 일단 환경은 만들어줬다.


날이 엄청 뜨겁고 더웠다. 바람은 많이 불었다. 놀이터는 땡볕이었고 바닥 분수는 그늘이었다. 옷이 젖으면 놀이터에서 놀기가 힘드니 일단 놀이터부터 섭렵했다. 단지 안에 있는 세 군데의 놀이터를 돌아다녔는데 (내) 동생은 나에게 물었다.


"애들이 별로 열심히 안 노네?"

"아, 소윤이랑 시윤이는 원래 이래. 막 엄청 열정적으로 놀지는 않아. 그런데 또 길게 놀기는 해"


소윤이와 시윤이 특유의 잔잔하고 긴 호흡이 있다. 남들이 보면 '별로 재미없나'라고 생각할 만큼 뭔가 차분한 느낌. 그네만 한참 타고. 게다가 오늘은 소윤이와 시윤이의 모든 관심이 바닥 분수에 쏠렸다. 바닥 분수에 가서 옷이 젖으면 다시 놀이터에서는 못 논다는 걸 한 번 더 주지시키고 바닥 분수에 갔다.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옷이 조금씩 젖을수록 흥분하며 소리를 지르고 웃어댔다. 놀이터에서 놀 때 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진심 어린 흥분과 웃음을 어른 모두 흐뭇하게 지켜봤다.


서윤이는 유모차에 계속 누워 있었다. 그러다 똥을 쌌는데 기저귀고 물티슈고 아무것도 없어서 서윤이를 데리고 집에 들어갔다. 아내는 TV를 보고 있었다.


"좀 자지 왜"

"괜찮아. 별로 안 졸려"


서윤이를 씻기고 기저귀를 갈아준 다음 다시 나왔다.


"여보. 좀 자라니까. 피곤하잖아"

"응, 알았어"


다시 나갔더니 소윤이 입술이 파랬다. 역시 그늘진 데다가 바람까지 많이 부는 곳에서 차가운 물을 맞으니 안 추울 리가 없었다. 아무리 날이 뜨겁다고 해도.


"소윤아. 춥지?"

"아니여"


새파랗게 변한 입술로 소윤이는 진실을 회피했다. 춥다고 하면 들어가자고 할 걸 아니까. 그래도 너무 추우니까 더는 못할 거 같다는 어른들의 권유에 소윤이와 시윤이는 순순히 바닥 분수에서 나왔다. 다시 물어봤다.


"소윤아. 진짜 안 추워?"

"아니여. 추워여"


집에 들어가자마자 욕조에 물을 받아서 목욕을 했다. 애들 목욕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동생과 엄마가 담당했던 거 같다. 신경을 안 써서 정확히는 모르겠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평소에 비하면 무례한 언행이나 고집이 많이 안 보였다. 엄포가 먹힌 건가.


저녁 먹기 전에 다 함께 나가서 산책을 겸한 저녁 식사 탐색에 나섰다. 출발할 때는 몰랐는데 갔다 와 보니 2시간이 걸렸다. 생각보다 고된 여정이었다. 시윤이는 중간에 잠시 멈춰서 치킨이 다 튀겨지는 걸 기다릴 때 서서 졸았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서 있는데 졸았다. 그것도 꽤 깊이. 아이스크림으로 큰 고비를 넘긴 뒤부터는 다시 졸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다음 질문 세례는 이거였다.


"아까 어두워지면 킥보드랑 자전거 잠깐 타기로 했잖아여"


가장 먼저 식사를 마치고 보채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내) 엄마가 나갔다. 그걸 보고는 아빠도 따라나섰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저녁 식사 자리가 정리되었다. 이번에도 다 같이 나가려고 했는데 아내는 서윤이 수유하고 재워야 해서 남고, 난 그냥 쉬고 싶어서 남았다.


시간상으로는 서윤이의 마지막 수유가 되어야 했다. 서윤이도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는 건 처음이었다. 과연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아내는 평소보다 더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됐나 궁금할 때쯤 서윤이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역시 잠자리 바뀐 게 좀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또 금방 고요해졌다. 한참 조용하길래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여보?]


답장이 없었다. 한 번 더 보내 봐도 마찬가지였다. 잠들었던 아내는 밖에 나갔던 나머지 식구가 들어올 때쯤 깨서 나왔다.


소윤이의 표정이 뭔가 어두웠다. 얼굴 전체에 어떤 울음의 기운이 깔려 있었다.


"소윤아. 울었어?"

"........"

"울었어?"

"........"

"말 안 하고 싶어? 알았어 그럼 안 해도 돼"

"울었어여"

"왜?"

"고모한테 혼나서"

"왜?"

"제가 시윤이 킥보드를 잔디에 던져서여"

"아 그랬어? 그래서 울었어?"

"네"


더 이상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자세한 상황이 어땠는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어쨌든 혼날 만한 행동을 했으니까 혼났을 거고, 내심 좋았다. 좋았다는 말이 좀 이상할지는 몰라도, 소윤이는 나나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훈육을 받는 게 필요하다. 기왕이면 그게 가족이라면 더 좋다. 아내나 나를 제외한 사람 중에 가장 사랑이 넘치니까. 사랑이 넘치지만 칼같이 단호한 훈육이 가장 효과가 좋다.


소윤이도 혼났다는 사실보다 혼낸 사람이 '고모'라는 게 더 마음이 상했을 거다. 아무튼 [혼내는 사람 = 오직 엄마, 아빠] 가 아니라 [잘못하면 = 혼난다 = 누구에게든] 이 공식이 좀 들어갔으면 좋겠다. 나름 충격이 있었는지 자러 들어갈 때까지 다소 우울감을 가지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서윤이는 아까 그게 밤잠, 통잠이었다. 속단하기에는 일렀지만 아내와 내가 소윤이를 재우고 나서도 한참이나 더 있다가 자러 들어갔는데, 그때까지도 깨지 않았으니 그럴 가능성이 컸다.


서윤이도 언니, 오빠처럼 자는 건 별로 안 예민하구나. 서윤이가 첫 외박이었다는 걸 느끼지도 못했을 만큼 무던하게 지나가다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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