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7(토)
"엄마, 진짜 내일은 우리 어디라도 가자여"
소윤이는 어제 아내에게 자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누가 들으면 주말마다 집에만 박혀서 보낸 줄 알겠네. 불태운 주말만 모았어도 화력 발전소를 하나 차렸겠고만.
"소윤아. 그런데 오늘은 아빠 친구들 만나러 가야 되는데? 엄마랑 시윤이는 안 가고 아빠랑 소윤이랑 시윤이만"
"다른 친구들도 와여?"
"아니, 소윤이랑 시윤이만. 싫어?"
"아니여. 좋져"
엄마랑 서윤이가 안 가고 아빠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거니 혹시라도 싫다고 할까 봐 아주 조금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언제 나가냐고 끊임없이 물어볼 정도로 '외출' 그 자체를 갈망했다.
며칠 전에 단체 카톡방에서 토요일에 시간이 괜찮냐고 묻길래 처음에는 괜찮다고 답했다. 점점 토요일이 다가올수록 아내에게 몹쓸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요일쯤 난 아무래도 애들(소윤이, 시윤이)을 데리고 가야 할 거 같다고 통보했다. 아내에게는 목요일에 얘기했다.
"여보. 애들이 토요일에 만나자네"
"아, 그래? 어디서?"
"삼송 근처에서. 소윤이랑 시윤이만 데리고 갈게?"
"서윤이는?"
"어? 서윤이? 서윤이는 수유해야지"
"어? 아, 오빠들끼리 만난다고?"
"어. 남자들끼리"
"그런데 소윤이랑 시윤이는 왜 데리고 가?"
"그냥. 여보 너무 힘들어"
"괜찮아. 애들을 왜 데리고 가"
"아니야. 주말까지 그러면 너무 힘들어"
"진짜? 괜찮겠어?"
"어, 괜찮아. 애들 말 잘 듣는데 뭐"
기껏해야 만나서 밥 먹고 커피 한잔하는 건데 못 데리고 갈 것도 없었다.
서윤이는 꽤 오랫동안 바닥에 누워서 모빌을 봤다. 맨날 아내한테 전해 듣기만 했는데 한참을 누워서 모빌을 보며 파닥거리다가 스르르 잠드는 서윤이의 모습은 내 마음을 정화시켰다. 울지만 않으면 몇 시간을 봐도 지루하지 않을 거 같았다. 나와 소윤이, 시윤이가 나가고 아내와 둘이 있을 때, 잘 자서 부디 아내에게 달콤한 휴식을 주길 바라며 집에서 나왔다.
친구들하고는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애 둘을 데리고 나가는 나를 위해 우리 집 근처에서 보기로 했다. 식당도 평소에 우리 가족이 자주 가는 칼국수 집이었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수제비를 먹었다. 소윤이는 완전히 자율로 아주 잘 먹었고 시윤이는 아무래도 수제비가 포크에 잘 안 찍히는지 힘겨워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 먹었다. 그 노력이 가상하여 여러 번 먹여주기도 했고.
평소에 종종 보던 삼촌들이라 소윤이와 시윤이는 어색함이 없었다. 시윤이는 어제도 만났던 것처럼 일상의 시시콜콜한 대화까지 먼저 건네는 정도였고, 소윤이는 그 정도는 아니었고 수줍어하긴 했지만 대답도 잘 하고 먼저 말도 하고 그랬다. 밥 먹고 간 카페도 애들이 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곳이었다. '어디라도(공원같은 넓고 광활한 어느 곳)'을 원했던 소윤이와 시윤이의 성에 차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쿠키도 먹고 빵도 먹고. 삼촌이 사 준 과자도 먹고 딸기 우유도 먹고. 제법 자유롭게 뛰어놀기도 하고. 지루해 하거나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다. 애들이랑 놀러 나온 게 아니라 내 약속에 데리고 나온 거라 애들이 어떤 기분인지 계속 살폈다.
아내도 서윤이와 함께 밖에 있다고 했다. 특별히 목적지를 정한 건 아니고 그냥 '어디라도(온 가족이 어디라도 병에 걸렸나)' 갈까 하고 나왔다가 집 근처라고 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만나서 함께 들어왔다. 들어와서 손만 씻고 소파에 앉자마자 상체가 기울어졌고 그대로 소파에 누워 버렸다.
"여보. 들어가서 좀 잘래?"
"아니. 안 자"
라고 대답하고 바로 코까지 골며 졸았 아니 잤다. 달콤하게 한 30분 잤나. 남은 저녁 일정은 뭘 해야 하나, 뭘 먹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내) 엄마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엄마는 아빠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고 했다. 단골 갈비집이었다. 영상 통화를 마치고 얼마 안 돼서 바로 엄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소윤아"
"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소윤이랑 시윤이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돈 보내주신다고 했거든? 그러니까 엄마, 아빠랑 저녁에 나가서 맛있는 거 사 먹어? 알았지?"
갑작스레 생긴 부모 재난 지원금 덕분에 외식이 결정됐다. 성경에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고민하지 말라고 하셨거늘 일생일대의 고민처럼 도대체 무엇을 먹어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여보. 먹고 싶은 거 없어?"
"나? 있어. 고기. 막 숯불에 구워서 연기가 자욱하고 냄새 옷에 막 배는 그런 고기"
"하아. 나도"
소윤이와 시윤이는 이제 동행이 가능하지만 서윤이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그림의 고기라고 생각하고 무얼 먹을까 살필 겸 동네를 거니는데 눈에 띄는 곳이 보였다. 평소에도 사람이 많아서 눈에 띄었지만 항상
"우린 언제 저런 데서 먹어보냐"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지나치곤 했다. 오늘따라 날씨도 선선하고 야외에 자리도 많이 있었다. 마침 우리 가족 앉으라고 비워둔 듯한 한자리가 보였다. 야외라 서윤이를 유모차에 앉혀 놓고 먹으면 될 거 같았다.
"여보. 저기 갈래?"
"괜찮을까? 서윤이 때문에"
"왜. 야왼데 뭐. 옆에 유모차에 눕혀 놓으면 되지 뭐. 여보 고기 좋아하잖아"
"그렇긴 한데"
"가자. 가 보자"
아내는 육식성 남편에게 고기를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엄청난 추진력을 발휘했다. 아내의 추진력 덕분에 우리의 저녁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고기가 맛있기도 했지만 선선한 바람이 부는 야외에서 구워 먹으니까 꼭 여행을 온 듯한 느낌이었다. 거기에 애 셋을 데리고도 이렇게 평화롭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쾌감도 있었다. 역시나 가장 큰 공로자는 서윤이었고. 유모차에서 울지 않고 잘 놀았다(실제로 놀았는지 버텼는지는 모르지만, 기분이 좋아 보였으니까 그렇게 해석한다).
"여보. 너무 좋다. 이 기름들 안 닦아도 되고. 설거지 안 해도 되고"
"그치?"
"너무 좋아"
모두 만족한 저녁 식사였다. 가는 길에 소윤이가 좋아하는 바이킹이 오늘도 있었다. 앞서 몇 차례 타도되냐고 물어봤는데 오늘은 안 된다고 대답했다. 왠지 지나칠 때마다 태워주는 건 별로 안 좋은 거 같아서 그렇게 대답했는데 막상 바이킹 앞에 서서 고개를 들고 한참을 바라보는 소윤이를 보면 늘 마음이 흔들린다.
"소윤아. 한 번 탈까?"
"좋아여"
오늘은 끝자리에 앉겠다고 했다. 아무리 미니 바이킹이라지만 무시할 높이는 아니었다. 소윤이가 탈 때는 소윤이 혼자였다.
"소윤아. 어때? 안 무서워?"
"쪼금 무서운데 괜찮아여"
확실히 중간 자리보다는 훨씬 강렬했는지 조금 긴장한 게 보였다. 시윤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무섭다며 가까이 오지도 못했다. 소윤이는 조금 적응하니까 한결 더 여유를 찾았다. 타고 내려온 소윤이에게 물었다.
"소윤아. 다음에는 중간에 탈 거야? 끝에 탈 거야?"
"음, 중간이랑 끝 사이에"
"그럼 만약에 중간이랑 끝 중에 골라야 하면?"
"끝에여"
원래 집에 오면서 놀이터에서 잠깐 놀려고 했는데 아이스크림을 먹는 바람에 시간이 너무 지체될 거 같았다. 소윤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로 집으로 귀가했다. 아내는 요즘 서윤이가 밤잠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지나자 조금 초조한 눈치였다. 마침 서윤이도 아내에게 안겨 잠들었다가 깼다를 반복했고. 어렵게 잡은 수면의 규칙성이 혹여라도 깨지면, 그것만큼 슬프고 좌절스러운 일이 또 없긴 할 거다. 물론 이러다 뜬금없이 자고 깨는 시간이 바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미리부터 거기에 초탈할 필요는 없으니까. 늘 말하지만 규칙성과 일관성이 잠시라도 생겼을 때는 누리는 자가 승자다.
내일도 많은 일정이 쌓여 있다. 놀이터도 가야 하고, 시간 되면 공원이라도 가야 하고, 세차도 해야 하고. 혹시라도 시간과 여건 상 소화하지 못하는 일정은 클라이언트 아니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정중히 양해도 구해야 한다.
마음껏 부려 먹으렴. 나중에 커서 이 추억을 꺼내 먹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