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두 얼굴

20.06.30(화)

by 어깨아빠

아침에 깨서 거실에 나왔는데 거실이 엄청 깨끗하고 깔끔했다. 평소에도 그런 편이지만 오늘은 유독 더. 낮에 손님이 온다고 해서 아내가 어제 열심히 치웠나 보다. 어제 너무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서 잤는데, 거실 상태로 보아하니 꽤 늦은 시간까지 정리를 한 거 같았다. 역시나 나중에 통화해 봤더니 1시까지 집을 치우고 잤다고 했다.


같이 처치홈스쿨 하는 두 가정 (엄마와 아이들만) 이 온다고 했다. 점심때쯤 온다고 했고 아내는 떡만두국을 준비한다고 했다. 그나마 손이 덜 가는 음식이긴 하지만 아내는 어제 자기 전에 명언을 남겼다.


"우리 애들 계란밥 해먹이는 것도 정신이 없는데"


하긴. 아내의 처지에 쉽고 간편한 음식이 어딨으랴. 가끔은 물 한 잔 달라는 요청에도 즉각 응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아무튼 아내의 건투를 빌었다.


나도 정신없이 바쁘고 아내도 마찬가지여서 연락을 못하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아내에게 카톡을 하나 보냈다.


[손님맞이는 잘 하고 있는가용?]

[오. 텔레파시]


아내도 마침 연락을 하려던 참이라고 했다. 집에서의 일정은 모두 마치고 잠깐 밖에 나가려는 중이라고 했다. 나가서 좀 놀다가 헤어질 거라고. 서윤이가 낮잠을 길게 자 줘서 그나마 수월했다고 했다. 식사 준비도 잘 됐고.


이 정도 느낌으로 아내의 오늘 하루를 짐작했는데 막상 집에 와서 들어보니 훨씬 고단한 시간이긴 했다. 특히 시윤이가 자잘자잘하게 뺀질거렸나 보다. 자잘하다고 하기에는 아내의 표현이 적나라했다.


"으. 열받아. 하루 종일 어찌나 말을 안 듣는지. 인간적으로 화가 난다"


식탁 의자에 바로 앉으라고 했는데 계속 이상한 자세로 걸터 앉는다거나, 손을 씻고 오라고 했는데 자꾸 물장난을 한다거나 뭐 이런 것들이다. 들고 있던 옷을 소파에 집어던지며 어금니를 무는 아내의 모습은 물론 장난이 섞여 있었지만, 그렇다고 100% 장난은 아니었다.


함께 저녁을 먹는데 소윤이가 얘기를 꺼냈다.


"아빠. 주일에는 시간 없을지도 모르니까 물총은 토요일에 사자여"


순간 속으로 '응? 뭐지?'라고 생각했다. 원래 오늘 밥 먹고 물총을 사러 가는 게 소윤이와의 비공식 합의 내용이었다. 저녁 먹고 나면 다 함께 근처 다이소에 물총을 사러 가는 것으로 아내하고 이야기도 끝낸 상태였다. 소윤이는 아마 잊은 듯했다.


"그래. 소윤아"


아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양 소윤이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대답을 붙였다. 저녁 다 먹고 냉장고에 반찬을 집어넣으면서 소윤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내와 입모양으로 의사를 주고받았다.


"여보? 어떻게 해?"

"뭘?"

"물총"

"외출"


007 첩보전이 따로 없구나. 아내는 아까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대답한 거고 물총을 사러 가도 된다고 했다. 소윤이에게 공식 발표를 하지는 않았는데, 엄마와 아빠의 밀담 해독 능력 1급 자격증을 보유한 소윤이는 눈과 귀를 아내와 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아빠. 어디로 외출을 한다고여?"


내 딸이지만 눈치는 정말 빠르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저녁 식사 후 물총 구입을 위한 외출이 확정되었다는 걸 알렸다.


서윤이의 취침 시간이 임박했지만 아내는 왠지 여유가 있었다. 손님맞이를 끝내서 여유가 좀 생겼나. 아무튼 시간으로 따지면 짧지만 내용으로는 설레기 충분한 밤 외출을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물총을 사러 간 건데 다른 걸 더 많이 사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 들러서 커피도 사고, 빵집에 들러서 빵도 사고.


아 그랬구나. 아내가 여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 먹고 싶었던 게 있었던 거구나. 그랬구나. 물총은 거들 뿐이었구나. 그랬구나.


시윤이는 15분 남짓한 돌아오는 시간에 차에서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안고 집으로 올라가는데 정말 무거웠다. 시윤이를 안고 이렇게 오래 걷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했다. 벌써 소윤이만 해도 안아주는 일도 흔치 않을뿐더러 안고 걸었던 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서윤이는 졸리고 배고파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너무나 신기한 건 오늘 드디어 엄지손가락을 빠는 메커니즘이 거의 완벽에 가까워졌다는 거다. 소윤이, 시윤이가 빨던 그 모습, 그 자세 그대로였다. 진짜 너무 신기하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손가락의 위치와 자세가 어쩜 그리 똑같은지. 그동안은 손을 빨았다면 오늘은 정확히 엄지손가락만 넣고 빠는 시간이 많아졌다.


"여보. 너무 귀여워서 그냥 그대로 두고 싶네"

"시윤이도 그러다가 지금까지 빨게 됐지"


서윤이 엄지손가락의 운명이 어찌 될지 나도 궁금하다.


시윤이는 집에 도착해서 깨웠다. 씻기기도 해야 하고 오줌도 싸게 해야 하고. 속도감 있게 남은 일정(은 아니고, 씻고 화장실 가고 옷 갈아입기)을 진행했다. 오늘도 서윤이는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침대에 눕혀졌는데, 어둠 속에서 격렬하게 촵촵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한 번씩 헛구역질도 하고.


어쨌든 그렇게 오늘도 끝났다.


오늘은 시윤이의 저녁 식사 기도가 참 인상적이었다. 어제 했던 기도와 오늘 하는 기도가 거의 복사, 붙여넣기 수준인 시윤이었는데 오늘은 좀 달랐다.


"아빠가 회자에 가따가 무자히 오 쭈 이께 해주져저 감삼니다앙. 아빠가 안저언전(안전운전)하고 오 쭈 이께 해주데 해주져저 감담니다앙"


하루 종일 시윤이 때문에 어금니가 닳도록 꽉 문 아내에게는 참 얄미운 광경이었겠지만 나에게는 하루의 피로가 싹 씻겨 나가는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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