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1(수)
몇 시였는지 모르겠다. 소윤이가 슬픈 목소리로 자기 이불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내 이불 어디 갔지?"
소중한 수면 시간을 방해받았고, 도대체 이불이 뭐라고 그렇게 소란을 피우나 싶어 짜증이 났지만 잠결에도 소윤이의 입장은 다를 거라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인지 아니면 한참 뒤인지 아무튼 소윤이가 날 깨웠다.
"아빠. 이제 회사 가야 되지 않아여?"
"아 소윤아. 아빠 자는 것 좀 방해하지 마"
그건 참지 못했다. 알람이 두 눈을 부릅 뜨고 기다리고 있는데 굳이 먼저 나를 깨우다니. 시간을 보지 않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깊이 잠들지는 못했다. 얼마 안 돼서 알람이 울린 걸 보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던 거 같다. 소윤이도 깨어 있었다.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소윤이가 방에서 따라 나왔다.
"아빠. 안녕. 잘 갔다 와여"
"그래, 소윤아"
짜증의 기운이 조금 남아 있어서 무미건조하게 대답을 했다. 씻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나니 괜히 미안했다. 다시 방에 들어갔다. 소윤이는 자지 못하고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소윤아. 아빠 갔다 올게. 사랑해"
"아빠. 잘 갔다 와여"
진한 뽀뽀와 포옹으로 사과를 대신했다. 사과는 했지만 다음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또 똑같이 행동할 가능성이 98.9%다. 잘 때는 내가 내가 아니다. 아닌가 잘 때의 내가 진짜 나인가. 아무튼. 회사에서도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내에게 아이들, 특히 소윤이의 동태를 물었는데 아주 잘 놀고 있다고 했다. 어제 산 물총을 가지고 아주 깔깔거리면서.
아내에게 요즘 자주 나타나는 증상이 있는데 일명 [말했지 증상]. 나는 들은 적이 없는데 자기가 겪은 일을 다 말해줬다고 생각 및 전제하고 대화하는 증상이다.
"여보. 오늘 내가 거기 갔다고 했잖아"
"응? 어디?"
"아, 내가 말 안 했나?"
"여보. 내가 오늘 거기 갔다고 말했지?"
"아니? 말 안 했는데?"
"진짜? 아까 하지 않았어?"
"아니"
"그래? 그럼 누구한테 말했지?"
낮에 하도 정신이 없으니까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이게 어제 일어난 일인지 오늘 일어난 일인지 뒤죽박죽이 되는 거다. 오늘도 낮에 장모님이 오셨다는 사실, 점심때 뭘 먹었는지, 카페는 어디를 갔는지를 얘기하면서 오락가락했다.
어쨌든 아내는 오늘 평소에 비하면 훨씬 힘과 여유가 있어 보였다. 장모님도 만나고, 애들의 외숙모 (아내의 올케) 도 만나고. 애들도 외숙모 덕분에 놀고 싶은 욕망도 해소하고, 당연히 아내에게 미치는 좋지 않은 영향도 줄어들고.
시윤이가 가장 힘들어 보였다. 너무 졸려서 자칫하면 스스로 큰 화를 자초할지도 모르는 상태였는데 잘 타이르고 토닥이면서 무사히 저녁 식사를 마쳤다. 아내는 계속 서윤이를 안고 있었다. 내가 집에 들어올 때부터 애들 재우러 들어갈 때까지. 서윤이는 자다가 깼다가 정신을 못 차렸고.
저녁을 먹고 나서 장모님이 사 오신 멜론을 먹었다. 꽤 맛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똑같이 느꼈는지 포크질이 아주 부지런했다. 두 녀석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조용히 포크를 내려놨다. 마지막 두 조각이 남았을 때 소윤이는 한 조각을 찍어서 아내에게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시윤이는
"내가 머그껀데에엥"
이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시윤아. 여기 하나 더 남았어"
"아, 그더네엥"
이내 기쁜 표정으로 바뀌며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이게 과연 첫째와 둘째의 차이인지, 딸과 아들의 차이인지. 첫째이면서 아들이기도 한 나의 인생을 되돌아 보면 아들놈이라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아니면 놀랍게도 내 아들이라 날 그대로 빼닮아서 그런가. 아무튼 소윤이는 정말 클수록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말과 행동을 할 때가 많아졌다. (내 마음을 타오르게 할 때도 많...) 점점 섬세해지는 소윤이의 감정선에 내 감정선이 못 미칠까 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오늘 아침 아니 새벽같은 상황에는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정말 오랜만에 자기 전에 애들한테 책을 읽어줬다. 퇴근하고 자러 들어가기 전까지 워낙 빡빡하게 돌아가다 보니 책을 읽어줄 시간 아니 여유가 없었다. 오늘은 아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아빠. 오늘은 오랜만에 소윤이, 시윤이한테 책 읽어줄 수 있나요?"
"아, 그럼"
소윤이와 시윤이는 각자 자기 수준에 맞는 책 중에서 가장 긴 책을 골랐다. 애들 책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 된다. 특히 소윤이가 고른 책은 읽는 데 한 15분은 걸리는 거 같다. 예전에도 몇 번 읽어준 적이 있긴 했는데 읽다 보면 너무 졸려서 완독을 한 적은 거의 없는 책이었다.
"아빠. 오늘은 졸지 말고 읽어주세여. 알았져?"
소윤이는 아예 자기가 고른 걸 먼저 읽으라며 내밀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소윤이가 고른 책을 다 읽고 시윤이가 고른 걸 읽었는데 중간쯤에 졸려서 혼이 났다. 한 번 정도 큰 고비가 있었지만 무사히 넘기고, 오늘은 완주에 성공했다.
오늘도 아내와 나에게는 한 세 시간 정도의 자유가 주어졌다. 이게 다 서윤이가 일찍(?) 자는 덕분이다. 물론 이 세 시간 동안 아내는 낮에 하지 못한 각종 집안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지만.
유일한 단점이라면 오늘 같은 날은 서윤이 얼굴을 본 시간이 10분도 안 된다는 거다. 애들이 엄마 껌딱지 인격체가 되는 건 다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