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분의 여유

20.08.14(금)

by 어깨아빠

아내와 나는 떨어져 있었지만 같은 처지였다.


[졸려]

[나도 완전 졸림]

[또 성경 읽다 졸았어]


이러니 육아가 힘들다, 바깥일이 힘들다, 집안일이 힘들다 따지고 재는 게 무의미하다. 공감과 인정없는 열심이 제일 힘들다.

어제, 오늘 다소 업무의 강도가 높았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이. 오후에는 사무실에 남아 있는 직원(나 포함 네 명)이 모두 업무 의지를 상실했다는 게 느껴졌다. 대표님도 그걸 느끼셨는지 퇴근 시간을 40여 분 남겼을 때 "그만들 하고 일찍 가"라며 우리를 풀어 아니 보내주셨다.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이 기쁜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전화를 하기는 했지만 그게 퇴근길이라는 건 밝히지 않았다. 집에 가서 벨을 누르고 "누구세요" 라는 집 안에서의 대답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고 있다가, '누구지'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 아내를 화들짝 놀라게 할 생각을 그때부터 했다.

딩동. "누구세요". 철컥. 짜잔. 어마앗!!!!

모든 게 나의 계획대로 착착 이뤄졌고, 난 만족할만한 반응을 얻어냈다. 서윤이를 안고 문을 열었다가 봉변을 당한 아내는 한참 동안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집에는 소윤이와 시윤이의 외숙모(아내의 올케언니)가 와 있었다. 아는 분에게 옥수수를 샀는데 우리와 나눠 먹기 위해 가지고 와서 찌는 중이었다. 덕분에 소윤이와 시윤이는 갑자기 외숙모와 놀 시간이 생겼다.

평소 같았으면 바쁘게 밥만 먹고 급히 교회로 가야 했을 나도, 퇴근도 좀 당겨졌고 소윤이와 시윤이의 관심에서도 좀 멀어진 덕분에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엄청 광활한 시간과 한가로움을 얻은 건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잠시나마 서윤이를 안고 있을 시간을 벌었다. 저녁을 먹을 때는 잠들어 주기까지 했고. 소윤이 때만큼 입에서 시큼시큼한 냄새가 나지 않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서윤이 특유의 침 냄새와 숨 냄새가 나긴 한다. 요즘은 소윤이에게는 거의 요구(?)하는 경우가 없고, 시윤이에게도 아주 가끔 '하아' 하고 코에 입김을 불어달라고 하는데 생각보다 '어른같은' 냄새에 움찔 놀랄 때가 많다. 서윤이가 유일하게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외숙모 (너무 3인칭 시점의 호칭이라 이상하지만, 내가 부를 때의 공식 호칭은 '아주머님'이라 이건 더 이상해서)를 집에 내려 주고 교회에 가기로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더 이상 늦으면 안 되는 시간까지 꽉꽉 채워서 놀고 숙모를 놔 줬다. 다들 아직 씻기도 전이라 아내가 애들을 재우는 데까지 도달하려면, 꽤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하는 게 걱정이었다. 아내는 교회에 가는 나에게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커피를 사 오라고 했다.

역시나 아내는 꽤 늦은 시간에 애들을 재우고 퇴근 도장을 찍었다. 내가 돌아왔을 때 아내는 소파에 앉아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사다 준 아이스 라떼가 화룡점정이었다. 그렇게 작게나마 기력을 충전한 아내는 다시 집안일에 매진하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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