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7(월)
갑자기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졌다. 이미 다른 세상이었지만 또 다른 세상이 된 것처럼. 어제 장인어른이 아내에게 "내일 파주에 와서 점심 먹을래?"라고 제안하셨다고 했다. 파주에 가기로 하긴 했는데 파주에 있는 스타벅스에서도 확진자가 꽤 많이 나왔다.
"여보. 점심은 그냥 집에서 뭐 사다 먹어야겠다"
"그래"
애석하게도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아내는 지난밤에도 잠을 설쳤다. 서윤이가 뭔가 바뀌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새벽에 또 깼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가혹한 밤을 보냈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쓰러진 듯한 자세로 곤히 잤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손짓을 해서 거실로 내보내고 나도 서윤이를 안고 거실로 나왔다.
다행히 서윤이는 기분이 좋았다. 잠시 바닥에 내려놓고 애들 아침밥을 차려 줄 여유가 생겼다. 사실 별거 없었다. 시윤이는 '볶음밥'이 아닌 '그냥 계란밥'을 원했기 때문에 밥에 명란 넣고, 계란 프라이 얹어서 비벼줬다. 다만 계란 프라이에 굉장히 정성을 들였다. 스테인리스 팬을 잘 달궈서 은은한 불에 오랫동안 익혔다. 노른자를 살려서 비볐다.
"아빠. 엄청 맛있다여"
"아빠아. 더두영. 더는 그양 계안밥이 도아영"
그게 다 아빠의 정성 때문이다. 계란 노른자의 고소함이 감칠맛을 더했다는 걸 너희가 꼭 알아서. 십수 년 뒤에라도.
마음 같아서는 서윤이를 안고 물고 빨고 생난리를 치고 싶었지만, 소윤이와 시윤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어서 그러지는 못했다. 눈치껏 조금 안고 놀다가 다시 내려놓고 소윤이와 시윤이 앞에 앉아 대화하고. 다시 안고 놀다가 내려놓고 대화하고. 서윤이가 너무 조용하길래 봤더니 엎어진 채로 자고 있었다. 서윤이의 모든 순간순간을 빠짐없이 눈과 머리에 담고 싶은데, 너무 아쉽다. 이렇게 흘러가는 게.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 파주에 도착했다. 원래 점심을 사서 가려던 식당이 휴무였다. 거기뿐만 아니라 여러 곳이 그랬다. 점심 사느라 생각보다 시간을 꽤 많이 썼다. 차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소윤이는
"할머니 집에 빨리 가자여. 빨리 빨리 빨리"
라며 보챘다. 그래도 소윤이가 많이 큰 게, 이런 상황에 능청과 여유를 넣을 줄 알게 됐다. 자기 진심이긴 하지만 엄마, 아빠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라는 것도 아니까 웃음을 섞어 장난처럼. 많이 컸다.
한참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가면 말을 너무 안 듣고 대놓고 다른 사람처럼 굴어서 열이 받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게 좀 덜해졌다. 쉬지 않고 군것질을 요구하고, 먹던 것도 많이 괜찮아졌고. 애들 신경 쓰느라 부모님 집이라고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던 게 사실인데, 오늘 오랜만에 파주에 갔더니 그런 불편함이 사라진 걸 느꼈다. 그제 어제 신림동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아마 아내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점심 먹고 아내랑 잠깐 커피 사러 나갔는데 엄청 색다른 느낌이었다. 30분도 안 되는 데이트의 ㄷ 자도 느끼기 힘든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쨌든 그것조차 오랜만이었으니까. 과연 언제 올지 모르지만 (설마 다시 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 아내랑 둘이 데이트하는 날이 오면, 엄청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애 셋을 어떻게 맡기나'하는 생각도 들고.
서윤이 영유아 문진표를 작성해야 한다는 아내를 따라 방에 들어가서 누웠다가 그대로 한 시간을 넘게 잤다. 요즘에는 정말 머리만 대면 여지없다. 오늘도 엄청 달콤하기는 했는데 잠에서 깨는 데 오래 걸렸다.
"여보. 벌써 6시야. 이제 슬슬 갈 준비해야지"
뭐가 6시고, 여긴 어디인지 하는 걸 깨닫는 게 한참 걸렸다. 자는 동안 소윤이와 시윤이는 목욕을 하고 나와서 TV를 보는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로 원하는 만화가 달라서 조율중이었다. 소윤이는 뿡뿡이, 시윤이는 타요. 생각보다 의견 조율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누구도 양보의 의지가 없었다. 평행선이었다. 어쩔 수 없이 시간제한을 뒀다.
"둘 다 양보하지 않으면 둘 다 못 보는 거야"
보통 그러면 어느 한쪽은 자기 의견을 접곤 하는데 (사실 소윤이가 양보하는 경우가 월등히 많다)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소윤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시윤이 탓이 더 크다. 요즘 둘 사이의 갈등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윤이는 정말 자기가 원하는 걸 주장한다기보다는 누나가 고른 것의 대척점을 고를 때가 많다. 내가 보기에는 반대를 위한 반대다. 무엇이 시윤이를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다. 오늘도 그래 보였다. 오늘은 소윤이도 조금 삐딱선을 탄 게, 자꾸 시윤이한테 부드러운 협박 내지는 교활한 말 속임을 구사했다.
결국 아무도 TV를 보지 못했다. 소윤이는 이미 TV를 끄고 난 뒤에서야 "타요라도 보겠다"라며 서럽게 울었다. 시윤이는 오히려 울지 않고 매우 당황한 표정이었다.
"시윤아. 누나가 왜 이렇게 우는지 잘 생각해 봐. 알았어? 시윤이 잘못도 커"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듯, '내가 너무했나'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소윤이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었다. 모두에게 알려주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불가피했지만.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그냥 보여주면 안 되나'라는 생각을 하시는 듯 안쓰러운 표정으로 지켜보셨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저번에도 헤어질 무렵에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소윤이는 슬픈 채로 차에 탔지만 금방 괜찮아졌다.
저녁은 간단히 먹이고 부지런히 눕혔다. 저녁에 형님(아내 오빠) 네가 놀러 오기로 했다. 아내가 들어가서 애들을 재우고 난 밖에서 일기를 쓰며 기다렸다. 형님네는 한 2-3시간 놀다가 갔다.
"아, 내일 출근이네. 엄청 길게 쉰 느낌이다"
"그러게. 여보 나도 싫다"
"뭐가?"
"여보 출근하는 거. 으아"
원래 점심때 비빔 국수 해 주려고 했는데 파주에 가느라 해 주지 못한 게, 내가 다 아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