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2(목)
아내는 오전에 엄청 바빴을 거다. 점심시간쯤 친구가 온다고 했는데 어제 전혀 준비(청소, 정리 등)를 안 했기 때문에. 아내는 매일 밤, 애들 재우고 나오면 그날의 혼돈과 난잡을 정리하는데, 어제 그걸 못 했으니 ‘어제 할걸’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치웠을 거다. 평소에도 이 정도면 애 셋 키우는 집 치고는 깔끔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내가 마음먹고 ‘더’ 치우는 날은 퇴근해서 문을 열면 또 한 차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모두 아내 친구를 좋아하고 잘 따랐다고 했다. 특히 시윤이는 양말 신거나 옷 입는 것도 ‘이모’랑 하겠다고 할 정도로. 시윤이가 의외로 그러는 편이 아니다. 낯도 많이 가리고 요즘에는 부끄러움도 많아져서 아무한테나 자기 일을 맡기거나 부탁하지 않는다. 그런 녀석이 오늘은 완전히 열려 있었다고 했다. 소윤이나 시윤이나 이모랑 뭔가 잘 맞았나 보다.
퇴근했을 때는 이미 아내 친구가 떠나고 없었는데도,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들어가자마자 ‘이모’가 사 온 선물을 보여주며 자랑하고, 이모가 뭘 사 와서 같이 먹었는지 얘기하고, 뭘 하면서 놀았는지 얘기하고. 아무튼 신기했다. 굉장히 오랜만에 만난 이모였는데, 둘 다 그렇게 좋아하고 낯설어 하지도 않는 게.
여느 날처럼 다 함께 저녁 식탁에 둘러앉았다. 난 마음이 급했다. 축구를 하러 가야 했으니까. 시간이 됐다고 얌체처럼 쏙 빠져나가는 게 너무 미안하니까 얼른 먹이고 최대한 수면 준비에 손을 보태고 싶었다.
“소윤아, 시윤아. 부지런히 먹어”
반찬 중에 김이 있었고, 밥은 식은 밥이었다. 밥이 식으면서 약간 덩어리가 되어서 시윤이가 숟가락으로 뜨기 어려웠다. 밥을 김에 싸서 시윤이 앞에 서너 개 정도 놔줬다.
“아빠. 왜 시윤이 밥을 싸 줘여?”
“아, 시윤이가 뜨기 어려울 거 같아서”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다른 의도도 있었다.
‘아, 시윤이가 뜨기 어려워서 오래 걸리잖아. 그럼 식사가 늦어지고. 그럼 아빠가 나갈 때도 괜히 더 미안하고. 그래서 빨리 먹이려고’
다행히 소윤이와 시윤이는 너무 늦지 않게 식사를 마쳤다. 난 이미 진작에 다 먹고 옷까지 갈아입었다. 시윤이와 소윤이를 차례대로 화장실로 호출했다. 아내는 괜찮으니까 그냥 두고 가라고 했는데, 괜히 미안해서 소윤이와 시윤이를 씻겼다. 사실 씻기는 건 이제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씻기는 건 오래 걸리지도 않을뿐더러 협조도 잘하니까. 소윤이와 시윤이는 사실 모든 면에서 그렇다. 쪼개서 보면 힘들 일이 뭐가 있나 싶다. 소윤이는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졌고. 쪼개서 보면 그런데 붙여놓고 보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고. 별거 아닌 일련의 과정들이 쌓이고 쌓이면, 그게 육아지 뭐.
취침 준비로 분주한 아내와 아이들을 뒤로하고 집에서 나왔다. 나의 취미 생활을 언제나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는 아내가 고마울 따름이다.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거실의 불이 꺼져 있었다. 여기저기 정리되지 않은 걸로 보아 아내가 재우러 들어가서 나오지 못한 것 같았다. 그때, 카톡이 왔다.
“여보. 방금 서윤이가 깨서”
재우고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 거였다. 금방 나올 것처럼 카톡을 한 아내는 다시 잠들었는지 소식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한참 뒤에 다시 나왔다.
“아, 정신을 못 차리겠네”
소윤이와 시윤이가 문제가 아니다. 잘 때만큼은 서윤이가 요주의 인물이다. 특히 요즘 들어, 수시로 깨서 아내를 괴롭 아니 힘들게 한다. 그러고 보니 하루 종일 3시간 이상 자는 게 굉장히 드문 일이네. 맙소사. 요즘 아내의 육아 피로의 90% 이상은 서윤이가 쌓았다.
소윤이 새로 산 패딩이 도착했다. 퇴근해서 밥 먹기 전에, 소윤이에게 입혀 봤다. 사실 소윤이가 먼저 자기 패딩이 도착했다면서 얘기했다. 시윤이 패딩은 사지 않았다. 소윤이가 입던 패딩이 너무 멀쩡했기 때문에, 새로 사기에는 아까웠다. 소윤이가 입던 걸 입으면 되니까. 문제는, 이제 시윤이가 이런 상황을 모두 정확히 파악한다는 거다. 소윤이에게 새로 산 패딩을 입히면서 괜히 시윤이한테도 너스레를 떨었다.
“시윤아, 너도 이거 패딩 입어 봐”
소윤이가 입던 패딩을 입히는데, 표정이 애매했다. 표현 그대로 애매했다. 난 바로 느꼈다.
‘아, 시윤이가 뭔가 서운하구나’
괜히 더 과장하며 시윤이를 띄웠다.
“오, 시윤이도 진짜 잘 어울리는데? 완전 짱인데? 누나랑 같이 입고 나가면 완전 멋있겠다. 진짜 잘 어울린다”
시윤이는 역시나 애매한 표정이었다. 뾰로통한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니고. 편하게 쉬고 싶어서 택시 탔는데 수다스러운 아저씨가 자꾸 말을 걸 때
“아, 네”
하면서 대화를 종결하려고 억지로 짓는 미소, 딱 그 표정이었다. 시윤이도 그 이상 서운한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표정에서 드러나는 걸 내가 읽었을 뿐, 시윤이 스스로 그걸 표현하지는 않았다. 내심 시윤이가 많이 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불쌍하기도 했고.
나중에 아내에게 들어보니 이미 낮에 한차례 일이 있었다. 패딩이 배송되자마자 신나게 뜯고, 입어보는 누나를 보고, 시윤이는 아내에게 얘기했다.
“엄마아. 데 꺼는여?”
“아, 시윤이꺼는 엄마, 아빠가 아직 고민하고 있어. 뭘 사 줄지를 못 정했어”
“엄마아. 왜 맨날 누나꺼만 먼더 사더여어”
그러고서는 서럽게 울었다고 했다. 시윤이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멀쩡한 패딩을 놔두고 새로 패딩을 사지 않는 아내와 나의 마음도 이해를 받기에 합당하고. 당장 입을 패딩이 없어서 꼭 새 패딩이 있어야만 했던 소윤이도 이해를 받아야 하고.
아내와 나는 패딩이 아니더라도 시윤이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주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생각보다 필요한 게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필요한 건, 이미 또 누나에게 물려받은 게 많았다. ‘새것’의 기쁨을 주면서도 실용적인 게 탁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하나 새로 사 줄까 싶다가도, 그러기에는 소윤이가 입던 패딩이 너무 멀쩡했다. (뭐 물론 그게 싸구려였으면 아깝지 않았겠지만, 꽤 큰돈을 주고 샀으니 그렇게 입고 버리기에는 아까웠다)
시윤아, 꼭 예쁜 옷 하나 사 줄게. ‘새 옷’은 절대 애정의 척도가 아니야. 누나는 물려받을 옷이 없을 뿐이고, 넌 물려받을 누나의 옷(구매할 때부터 물려줄 걸 계산해서 디자인, 색을 정하긴 했지만)이 많을 뿐이야. 그래도 이번에는 꼭 새 거 사 줄게. 너의 기분을 위해.
이것도 잘 기록해 둘 테니, 나중에 누나한테 좀 들먹거려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