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0(주일)
아침에 서윤이를 안았는데 뭔가 느낌이 달랐다. 보통 서윤이가 고개를 내 오른쪽 어깨에 걸치도록 안아주면, 서윤이가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손을 빨곤 한다. 위치상 내 볼이 서윤이 정수리나 뒤통수를 맞닿게 되는데, 평소보다 뜨거운 느낌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이마를 만져봤는데 이마는 멀쩡했다.
‘막 자고 일어나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서윤이는 예배드리기 전에 다시 잠들었고, 우리(아내와 나, 소윤이, 시윤이)는 아침 먹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렸다. 서윤이는 예배가 거의 끝났을 때쯤 다시 깼는데 달래러 들어간 아내가 얘기했다.
“서윤이 좀 뜨거운 거 같은데?”
“아, 그래? 안 그래도 아침에 좀 뜨겁나 싶긴 했는데, 이마는 멀쩡하길래”
“아니야. 좀 다른 거 같아”
“체온 재 봐”
“열나네, 37.8도”
서윤이의 첫 발열이었다. 이마만 안 뜨겁고 머리, 겨드랑이, 몸통 모두 뜨거웠다. 열이 나긴 했지만 서윤이가 눈에 띄게 처지고 그러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물론 평소보다 힘이 없고, 활동이 확 줄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축 늘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아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엄마 껌딱지인 녀석이 아예 아내의 일부가 되었다.
아픈 서윤이가 엄마에게 딱 붙은 대신, 난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집중했다. 지난 월요일의 실책을 떠올리며 ‘오늘은 절대 감정대로 하지 않겠다’라고 다짐, 또 다짐했다. 가르칠 건 가르치고, 혼낼 건 혼내면서도 사이좋게 지내는 첫걸음은 역시 감정을 다스리는 거다.
아침, 점심, 저녁 모두 내 몫이었다. 어차피 아내는 서윤이 때문에 뭘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점심에는 오랜만에 애들이 좋아하는 동물(모양 면) 파스타를 만들어줬다. 언제나처럼 너무 맛있다며 격렬하게 숟가락질을 하던 소윤이와 시윤이는 끝으로 갈수록 느려졌다.
“아빠. 너무 맛있는데 배불러서 못 먹겠어여”
“아빠아. 더두여어. 배불러여어”
어쨌든 계속 즐거웠다. 정말 조금도 쉴 틈이 없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점심 먹고 나서는 잠시 장을 보러 가야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당연히 아내도 같이, 아니 장 보기의 주체는 아내니까 나도 따라가는 거였는데, 상황이 바뀌었다. 서윤이에게 찬바람을 맞히는 게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아내랑 서윤이는 집에 남기로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소윤이가 얘기했다.
“아빠. 저는 그냥 집에 있을래여. 그래도 돼여?”
“그럴래? 그래도 되긴 하지. 왜? 귀찮아?”
“아니, 나가고 싶기는 한데 옷 갈아입고 갔다 와서 씻고 이런 게 너무 귀찮아여”
“그래? 알았어. 그럼 아빠랑 시윤이만 갔다 올게”
시윤이는 나가겠다고 했다. 시윤이에게 ‘아빠와의 데이트’라고 했다. 소윤이에게는, 엄마는 서윤이를 떨어뜨려 놓을 수 없고 더군다나 엄마의 피로가 극에 달하는 시간이라 소윤이랑 신나게 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려줬다. 소윤이는 그래도 집에 있겠다고 했다.
시윤이만 데리고 나왔다.
“시윤아. 아빠 옆에 탈래?”
“왜여어?”
“그냥. 데이트니까. 싫어?”
“아니여. 도아여어”
카시트를 조수석에 옮겨서 시윤이를 태웠다. 시윤이는 엄청나게 활력이 넘치거나 방방 뛰는 성격은 아니다. 물론 신이 날 때는 흥이 폭발하지만, 오늘처럼 둘이 어딜 가면 오히려 얌전한 편이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시윤이가 태어나서 조수석에 앉는 건 처음이었다.
“시윤아. 어때? 앞에 앉으니까 좋아?”
“네”
시윤이는 조곤조곤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바깥에 보이는 풍경도 묘사하고 그랬다. 최근 들어 생각과 표현의 폭이 한층 넓어진 시윤이라서, 대화하는 맛이 났다.
자연드림에 시윤이와 함께 들어갔다. 아내가 사 오라고 적어 준 목록을 보며 하나하나 챙기다가 냉장고에서 탄산수를 꺼냈다. 냉장고 문을 닫았는데 시윤이가 급히 말했다.
“아빠. 이 문을 열어뜨면 꼭 두스를 사 줘야 대여어”
“주스? 주스 마시고 싶어?”
“네에. 흐흐”
“그래, 하나 골라”
“더는 이거 먹을래여어”
“이거? 딸기 우유?”
“네에”
“그거 말고 다른 거 먹어”
“왜여어?”
“너무 비싸”
“그대여어? 그럼 이거?”
“그래 그거 먹어”
시윤이가 두 번째로 고른 건 처음 고른 것보다 500원 비쌌다. 500원 아끼자고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건 너무하다 싶어서 다시 얘기했다.
“아니다. 시윤아. 너 먹고 싶은 거 먹어. 딸기 우유 마실래?”
“네에”
마저 장을 보고 나가는데 시윤이는 딸기 우유를 언제 먹는지가 많이 궁금했나 보다.
“시윤아. 차에서 먹어. 안 흘릴 수 있지?”
“차에서 먹으면 안 대자나여어”
“오늘은 데이트니까 괜찮아. 아빠 옆에 있으니까. 흘려도 괜찮은데 조심해서 마셔. 알았지?”
시윤이는 쪽쪽 잘도 빨아먹었다. 카페도 들렀다. 물론 시윤이도 함께 내렸다. 카페에서도 ‘여기는 엄마, 아빠가 커피 사는 걸 보긴 했지만 들어와 본 건 처음이다’, ‘엄마, 아빠는 커피를 왜 이렇게 좋아하냐’, ‘아빠는 여기 와 본 적 있냐’같은 상황에 맞는, 대화다운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자연드림에 없는 게 있어서 한살림에도 들렀다. 과일 가게에도 들르고.
엄청 긴 것도 아니고 대부분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었지만, 즐거운 데이트였다. 통통한 맛이 있는 시윤이 손을 잡고 운전하는 것도 좋았고. 나중에 시윤이가 커서 털이 거뭇거뭇하게 난 뒤에도 이럴 수 있다면 그건 정말 큰 행복일 거다.
소윤이는 집에서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시윤이도 곧바로 합류했다. 그러고는 밖에서 뭘 했는지 소윤이에게 다 얘기했다. 소윤이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는데, 앞자리에 앉았다는 얘기에 1차로 충격(?)이 있었다. ‘그건 생각하지 못했는데’의 느낌이랄까. 딸기 우유를 먹었다는 말에는 조금 더 확실하게 충격을 받았다. 나는 다그치지 못하고, 자꾸 시윤이에게 ‘왜 누나 우유는 안 사 왔냐’고 하고, 시윤이가 생각을 못 했다고 했더니 ‘까먹지 말고 생각을 해서 아빠한테 말을 하지 그랬냐’라고 그러고. 진심으로 서운한 눈치였다. 아내의 해석으로는, 자기는 집에서 물감 하기 위해 외출과 우유를 포기한 셈인데 시윤이는 외출도 하고 물감도 하는 거니 손해 보는 느낌일지도 모르겠다는 거였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소윤아. 대신 이따 저녁 먹고 탄산수에 청귤청 타 줄게”
물감 치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내가 왜 그렇게 물감 얘기만 나오면 한숨을 푹 쉬며
“하아. 물감? 물감 하고 싶어?”
라고 되묻는지 조금은 알게 됐다. 공든 탑이 무너질 함정이 너무 많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정신을 똑똑히 차리고 피해갔다.
저녁을 뭘 먹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아내가 애들한테 말했다.
“그럼 우리 동시에 먹고 싶은 거 얘기해 볼까?”
“그러자여”
“자, 하나 둘 셋 하면 얘기하는 거야. 하나 둘 셋. 피자”
아내는 그냥 피자 먹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얕은수에 아이들을 동원한 게 아닐까. 우리의 저녁은 피자로 결정했다. 포장 할인을 위해 또 나갔다 왔다. 이번에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모두 데리고. 이번에는 딱 피자만 받아서 돌아왔다.
이런 피자(얇은 화덕 피자가 아닌 배달 피자 느낌의)는 애들이 먹는 게 그때그때 다르다. 어떤 날은 엄청 잘 먹고, 어떤 날은 너무 안 먹고. 오늘은 전자였다. 둘이 어찌나 잘 먹던지. 이제는 피자도 가장 큰 걸로 시켜야 할 판이다.
서윤이는 여전히 힘이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늘어지지도 않았다. 딱 그 경계선의 느낌이었다. 그래도 정말 다행스럽고 감사한 건, 똥을 두 번이나 대량으로 분출했다. 그것도 아주 건강한 색과 질감으로. 아플 때는 뭐든 밀어내야 낫는 게 순리다. 내보내야 할 걸 가지고 있으면, 그게 곧 아픈 거고.
아침부터 다부지게 마음을 먹은 덕분인지 하루 종일 쓸데없이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그 어느 주말보다 쉬지 않고 개미처럼 남편과 아빠의 역할을 수행했고, 덕분에 하루가 엄청 길었다. 아내도 동감했다.
“여보. 오늘은 왜 이렇게 하루가 길지?”
그게 지루하고 힘들어서 더디게 시간이 가는 느낌은 아니었다. 조금 꾸며서 말하자면 ‘애들이랑 이렇게 즐겁게 많은 걸 했는데 아직도 이 시간이라고?’의 느낌이랄까. 아무튼 마음이 훈훈했다. 주말이 끝나는 게 어느 때보다 아쉬울 정도로.
주말이 끝나는 게 아쉬운 걸 퇴근하는 게 아쉽다는 걸로 착각하면 안 된다.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퇴근은 매정하고 미련 없이 하는 게 미덕이다.
“소윤아, 시윤아. 벌써 주말이 끝났네. 아쉽다 그치?”
“아빠. 내일 회사 가지 마여”
“가디 마여어”
서윤이는 잠도 잘 잤다. 열이 나고 좀 힘들어 보여서 그렇지 오히려 똥도 더 잘 싸고 잠도 더 잘 잤다. 다행이다. 더 심해지면 서윤이도 힘들지만 아내가 너무 힘들 거다. 주말이야 남편의 힘으로 버텼다지만, 평일에 혼자 있는데 서윤이가 더 보채고 울면 체력과 정신력은 두 배 빠르게 소진될 테니.
하루 종일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본 아내는, 애들을 모두 재우고 아주 잠깐 나갔다 왔다. 나간다 한들 카페도 못 가고 어디 엉덩이 붙일 곳이 없으니, 하릴없이 올리브영만 한 바퀴 슥 돌고 왔다고 했다.
코로나도 모유 수유도 얼른 끝나야, 아내도 숨통이 좀 트일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