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12(화)
코로나 시대를 살며 세 아이를 기르는 전업주부의 삶이 얼마나 고단할까. 도대체 그 많은 시간을 무얼 하면서 보내는 걸까. 나도 궁금할 때가 많다. 아내는 오늘 우리의 결혼식 영상을 애들하고 함께 봤다고 했다. 어쩌다가 그걸 보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종류를 불문하고 영상을 아예 접하기 어려운 우리 아이들에게는 엄마, 아빠의 결혼식 영상도 엄청 재밌었을 거다. 덕분에 아내는 나름대로 시간을 잘 보냈을 거고.
‘엄마는 귀엽고 아빠는 아빠 안 같다. 아빠는 길에서 본 오빠 같다’
가 소윤이의 한 줄 평이다. 어렸을 때부터 노안이었고, 어릴 때 노안이면 커서 자기 나이 찾아간다는 소리를 제일 많이 들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구나. 그랬구나. 어릴 때 노안이면 늙어서 더 노안이구나. 그랬구나. 가장 객관적이고 정밀하다는 아이들의 눈에 그렇게 비치다니.
퇴근이 한 시간쯤 남았을 때, 갑자기 눈이 세차게 내렸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꽤 굵은 눈이 집중적으로 내렸고, 금방 눈이 쌓였다. 퇴근길이 심하게 막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사실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체념했다. 그 정도로 눈발이 거셌다. 아내에게도 미리 언질을 줬다. 혹시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미로.
다행히 나의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갔다. 오히려 차가 더 없었고, 평소보다 덜 걸렸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운전을 하는데, 창밖으로 엄청 예쁘게 눈이 쌓인 길이 보였다. 서로 다른 두 아파트를 양옆으로 둔 사잇길이었다. 사람의 발길도 많지 않은 곳이라 길이며, 나무며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아, 소윤이랑 시윤이 여기 데리고 오면 좋아하겠다’
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현재의 상황을 물었다. 아내는 이제 막 쌀을 씻었다고 했다.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아내도 좋다고 했다. 저녁은 계란밥으로 간단히 먹고 얼른 나오기로 했다. 집에 도착했더니 아이들도 외출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신속하게 저녁을 먹었다.
교회 근처라 집에서 멀지는 않았다. 눈도 그치고 날씨도 생각보다 따뜻해서 혹시 녹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대로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가는 동안 어디를 가는 건지 궁금해하기도 하고 기대도 많이 했다. 혹시라도 실망할까 봐 ‘그냥 눈이 예쁘게 쌓인 곳이야. 뭐 엄청 대단하지는 않고, 그냥 너네가 좋아할 거 같아서’라고 기대 수치를 낮췄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좋아했다. 아내도 만족했다. 서윤이는 내가 아기띠로 안았는데 처음에 조금 칭얼거리다가 금방 잠이 들었다.
소윤이와 시윤이, 아내는 눈길을 걸으며 눈을 던지기도 하고, 맞기도 했다. 막 달리면서 웃기도 하고, 큰 소리도 내고, 누군가 만들어 놓은 눈사람도 보고, 직접 자그마한 눈사람도 만들고. 난 곤히 잠든 서윤이를 안고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아내와 소윤이, 시윤이가 나에게서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그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릴 정도의 거리가 되었을 때, 아주 갑자기 약간 슬픈 감정이 느껴졌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우리 다섯 중 누구 한 명이라도 함께하지 못하는 어느 날이 되면,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선명하게 그리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이 모두 자라서 아내와 나의 품을 떠나고 없을 때 아내와 둘이 이 밤을 추억할지도 모르고, 먼저 가정을 꾸려서 나간 누나와 언니를 함께 추억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나 혼자 혹은 아내 혼자 이 풍경을 떠올릴지도 모르고. 어떤 식으로 기억이 되든,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고 좋지만 언젠가 마주할 추억의 순간에는 이때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굳이 그 순간에 깨달았다.
‘그때, 퇴근하는 길에 눈길이 예쁘다며 온 식구가 차를 타고 나가 눈을 즐겼던 어느 겨울밤, 그때 진짜 좋았는데’
라고 생각하며 그리워하기에 충분한, 좋은 시간이었다. 소중한 시간이었고. 나 혼자 눈과 밤의 감성에 취했다.
1시간 조금 안 되게 놀았다. 날이 며칠 전처럼 춥지 않아서 딱 좋았다. 서윤이는 내내 나에게 안겨서 자다가 다시 차에 태우니 깼다. 오는 길에는 어제 불렀던 아기공룡 둘리 노래와 은하철도 999 노래를 들으면서 왔다. 시윤이가 잠드는 걸 막기 위해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 덕분에 소윤이도 웃고 아내도 웃고, 집에 올 때도 즐거웠다.
밤과 눈이 가져다준 행복과 낭만은 딱 현관 앞까지다. 문을 여는 순간 다시 현실 세계다. 일사천리로 잘 준비를 마쳤다. 이제 소윤이가 어느 정도 스스로 씻을 줄 알기 때문에 보다 효율적으로 둘을 동시에 씻길 수 있다. 얼마 전에 소윤이가 ‘자기도 아기처럼 엄마, 아빠가 씻겨주고 입혀줬으면 좋겠다’라고 장난스럽지만 진심을 담아 얘기했던 게 조금 걸리긴 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어쩔 수 없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안다.
“엄마. 오늘은 책 못 읽져?”
“응, 오늘은 힘들지”
“알았어여”
아내와 아이들이 방에 들어가고 나서도 거실에서 혼자 오늘 밤을 곱씹으며, 찍은 사진과 영상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