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녀가 된 아내

21.01.15(금)

by 어깨아빠

아내는 파주에 간다고 했다. 언제쯤 출발하냐는 나의 물음에 아내는


“글쎄. 일단 할 일 좀 다 하고”


라고 답했다. 떠날 때도 홀가분하게 훌쩍 떠나지 못하고 할 일, 이를테면 빨래, 정리, 이유식 만들기 등의 일을 해야 한다. 미뤄봐야 더 많이 쌓여서 돌아올 뿐이니까. 아내는 그런 일을 미루고 가면 계속 마음이 불편하다고 했다. 막상 일을 할 때도 어디 안 가고 집에 있을 때는 여유롭게 할 수 있는데, 오늘 같은 날은 시간이 없으니 짧은 시간에 같은 양을 처리해야 해서 더 힘들다고 했다. 아내는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출발한다고 했다. 파주에 가서 점심을 먹는다고 했는데, 점심시간이 지날 수밖에 없는 아내의 분주한 일상을 존경한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오늘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저 할머니 집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좋아했다. 지난번에 갔을 때는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는데, 오늘은 칼국수였다. 장모님이 미리 예고하셨고, 소윤이와 시윤이의 기대도 한가득이었다. 아마 장모님도 소윤이, 시윤이랑 비슷한 심정이 아니셨을까 추정해 본다.


아내에게 저녁에는 몇 시에 올 건지, 집에 와서 저녁을 먹을 건지 아니면 먹고 올 건지를 물어봤다. 아내는 고민하고 있었다. 일찍 오면 장인어른이 퇴근하시기 전에 오게 되니, 장모님만큼이나 손주를 그리워하시는 장인어른에게 죄송한 일이었다. 반대로 시간이 늦으면 늦을수록 애들 챙겨서 집에 오는 것도, 도착해서 잘 준비하고 재우는 것도 버거워진다. 효도와 퇴근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내에게 결정이 되면 미리 말해달라고 했다.


난 저녁에 교회에 가야 했다. 아내가 늦게 온다고 하면 굳이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교회로 갈 생각이었다. 물론 중간에 시간이 많이 뜨고, 또 요즘에는 어디 들어가서 앉아 있을 수도 없지만 그래도 굳이 집에 갈 이유가 없었다. 평소에도 집에 가면 굉장히 빠듯해지지만 잠깐이라도 애들 얼굴보고 같이 저녁 먹으려고 가는 거다.


퇴근 시간쯤 아내에게 다시 물어봤다.


“여보. 어떻게 하기로 했어?”

“아, 이제 출발하려고 했는데 아빠가 오신다고 해서. 원래 6시에 오신다고 했는데 계속 안 오시네”

“아, 그래? 그럼 그냥 뵙고 와. 마음 편하게”

“여보한테 미안해서 그러지”

“뭘 미안해. 그냥 마음 편히 저녁까지 먹고 와”

“그럴까? 여보는 괜찮아?”

“나? 괜찮지”


아내와 아이들은 오랜만에 늦게까지 머물다가 왔다. 장인어른은 포항에 출장을 다녀오시는 길이었는데 게를 사 오셨다고 했다. 구매한 곳에서 쪄서 가지고 오셨는데, 딸과 손주에게 그걸 먹이실 생각에 ‘혹시라도 일찍 가면 어쩌나’ 싶으셨던 것 같다. 다소 슬픈 건, 장인어른이 사 온 게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는 거다. 영덕 대게와 비슷하게 생긴, 다소 저렴한 게를 사 오셨는데 먹을 게 없었다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언젠가 꽃게를 너무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어서 잔뜩 기대를 했다가, 이내 자리를 떴다고 했다. 장인어른의 그 마음이 무엇인지도 너무 잘 알겠고, 또 딸과 손주를 먹일 생각에 설레던 마음이 빈약한 게 때문에 산산이 부서진 것도 웃기고. 아내랑 한참 웃었다.


아내는 집에 꽤 늦게 왔다. 10시가 넘어서 애들을 재우고 짐 정리를 시작했다고 했다. 난 11시쯤 집에 돌아왔다. 영화를 보기로 미리 얘기했었다. 교회에서 오는 길에, 정말 오랜만에 치킨을 사 왔다. 집에 왔을 때 아내는 여전히 정리를 하고 있었다. 애들이 나를 많이 보고 싶어 했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아주 좋다. 누군가 나를 기다려 주고 그리워한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그리움을 담은 소윤이와 시윤이의 선물이 하나 있었다. 남은 칼국수 반죽을 얇게 펴서 프라이팬에 구워 크레페 반죽을 만들었나 보다. 그 안에 블루베리 잼과 딸기를 넣어 나름대로 크레페를 만들었다. 아빠를 주겠다고 그걸 파주에서부터 가지고 왔다. 맛은 뭐, 차라리 겉에 있는 크레페 반죽만 먹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은 맛이었다. 그래도 다 먹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제대로 반응하기 위해서. 맛은 없었지만, 아빠를 주겠다고 자기들 나름대로 그걸 만들고 통화하다가 말할까 봐 조심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갸륵한지. 남김없이 다 먹었다.


부지런히 영화 볼 준비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영화는 생각보다 많이 잔잔했다. 좋은 영화였는데 굴곡이 없는 영화였다. 아내는 영화 종반부쯤부터 졸았다. 재작년에 제주도 여행 가서 ‘남극의 쉐프’보다가 둘 다 존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내가 영화를 보다가 존 건.


그래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서윤이의 방해가 없었다.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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