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이은 취향 차이

21.03.23(수)

by 어깨아빠

지난 소윤이의 생일 선물로, 형님(아내 오빠)네 부부가 옷을 사주겠다고 했다. 아내와 나는 소윤이가 태어난 후로 지금까지 한결같이 원색이거나 화려한 옷은 피했다. 쨍하고, 새빨갛고, 샛노랗고 뭐 이런 류의 옷을 말하는 거다. 아내와 나의 취향이기도 하지만 소윤이에게 그런 옷이 안 어울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장모님은 소윤이가 태어난 후로 지금까지 한결같이 아내와 내가 피하려는 류의 옷을 사주고 싶어 하신다. 실제로 자주 사서 오기도 하셨지만, 아내의 칼 같은 교환 및 환불을 경험하고 나서는 포기하셨다. 그렇게 참으시다가 얼마 전에 그동안 쌓인 욕구를 폭발시키신 듯, 엄청난 양의 옷을 한꺼번에 사 오셨다. 그때 장모님이 사 오신 옷 중에 소윤이가 마음에 들어 하는 옷이 있었다.


평소에 아내와 장모님의 대화를 자주 들었던 소윤이는 요즘


“엄마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랑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좀 다른 거 같아여”


라며 자기 취향의 옷을 얘기하곤 한다. 그게 진짜 소윤이 취향인지는 의심스럽다. ‘내 뜻대로 옷을 고를 수 있는 쾌감, 소윤이가 좋아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는 할머니의 반복 학습’에서 비롯된 만들어진 취향이 아닐까 싶다. 지난번에 장모님이 사 주신 옷을 정말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하는 걸 보면, 정말 좋은가 보다 싶기도 하고.


아무튼 이번에도, 숙모(형님의 아내)가 소윤이의 취향을 고려해 여러 옷을 후보로 제시했다. 소윤이에게 고르도록. 사전에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고 했다. 소윤이가 숙모에게 이르기를, 자기는 이런 이런 옷을 좋아하니 엄마에게 말하지 말고 알아서 사 오라고 했다나 뭐라나. 숙모는 아내에게 후보군을 보내줬고, 아내는 소윤이에게 보여주며 이 중에 마음에 드는 걸 고르라고 했다. 그중 마음에 드는 걸 골랐던 소윤이는 조금 후에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근데 숙모가 보내준 게 진짜 이게 다에여?”


모종의 합의가 온전히 이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나 보다. 숙모는 지난번 소윤이가 마음에 들어 한 그 브랜드의 옷을 또 다른 후보로 다시 제시했다. 소윤이는 단번에 그걸 골랐고. 그 옷이 오늘 왔다. 아내는 소윤이의 피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뭐 내가 보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사실 어렸을 때와 비교하면 소화해내는 옷의 범위가 훨씬 넓어졌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렇게 식견 있는 것처럼 말하기에는 내 패션 감각이 워낙 꽝이라.


아내는 오후에 잠깐 친구네 집에 갔다. 친구가 생일이라 깜짝 방문을 했다고 했다. 내가 아내와 아이들보다 먼저 퇴근을 했고, 아내와 아이들은 한 10분 정도 뒤에 돌아왔다. 아내는 집에 오자마자 부지런히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이렇게 써 놓으면, 내가 마치 어떻게든 차려주는 밥 얻어먹으려고 혈안이 된 놈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절대 그런 건 아니다. 아내는 고기를 구웠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침에도 고기를 먹었다고 했다. 아내는 아침에도 먹어서 저녁에는 별로 먹고 싶지 않다면서 나와 아이들의 밥만 차렸다. 잘 먹었다. 나도. 소윤이도. 시윤이도.


저녁을 먹고 나서는 나의 목장 모임이 있어서 밥만 먹고 헤어졌다. 나는 작은방으로, 아이들은 안방으로. 목장 모임을 마친 뒤 방문을 열고 거실을 봤는데 아내가 없었다. 그때까지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조금 뒤 탈출에 성공했다.


아내는 허기가 진다며 먹을 걸 찾았지만 그래 봐야 눈에 걸리는 건 고작 라면이었다. 며칠 전에도 라면을 먹었으니, 또 먹는 건 너무 양심에 찔린다며 그냥 밥을 먹어야겠다고 했다. 계란밥을 먹는다고 하길래 만들어 준다고 했다. 계란밥 치고는 조금 더 정성을 들여서 마늘도 튀기고, 짜샤이도 넣고, 깨소금도 넣었다. 아내는 맛있게 먹었다. 다 먹고 주방쪽으로 간 아내에게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여보. 여기에 기름이 다 묻었네? 왜 그렇지?"

"그러게"


가스레인지의 화구 쪽에 기름이 흥건했나 보다. 나도 모른다. 진짜로. 왜 그랬는지는. 정황상 범인이 나인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과실이었다. 원인불명의 과실. 바닥에도 기름이 많이 튀었는지 아내는 잘 들리지는 않지만 아예 안 들리는 것도 아닌 듯한 크기로 한숨을 몇 번 쉬었다. 고기 구울 때도 기름 튀는 게 싫어서 호일까지 써 가며 갖은 수를 썼던 아내였다. 고작 마늘 몇 개 튀기겠다고 그 난리를 피운 거다. 내가. 조금 눈치가 보였지만 모른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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