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의 특권

21.03.28(주일)

by 어깨아빠

문은 닫혀 있었고 거실에서는 서윤이 웃음소리와 소윤이 목소리가 들렸다. 잠결에 방을 둘러봤더니 아내만 보였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서윤이를 데리고 거실에 나갔다고 생각했다. 서윤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웃어댔고 소윤이는 엄마와 아빠를 대신해 막내를 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느껴졌다. 소리만 들어도. 이상하게 시윤이 소리가 안 들렸다. 혼자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조용했다. 방을 다시 한번 살펴봤는데 시윤이가 구석에서 쭈그려 자고 있었다.


안 그래도 기특하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막내를 데리고 나간 소윤이가 더 기특했다. 그냥 데리고 나가서 방치하는 게 아니었다. 소윤이가 서윤이 앞에서 재롱을 떨었고 서윤이는 그걸 보며 기분이 좋았다. 소리만 들어도 보였다. 서윤이는 진짜, 언니와 오빠에게도 잘 해야 한다.


잘 놀던 서윤이가 갑자기 앙칼지게 울었다. 어딘가 다치거나 아플 때 내는 울음이었다. 거짓말 같겠지만 우는소리만 듣고도 이유를 파악하는 게 가능할 때가 있다. 구체적인 원인이 뭔지는 몰라도 아무튼 뭔가 짜증이 나서 기분이 안 좋을 때, 하려던 걸 못 하게 하거나 먹으려던 걸 못 먹게 해서 섭섭할 때, 갑자기 예상치 못한 고통을 당했을 때 정도는 가능하다. 점점 고조되는 게 아니라 바로 최대치의 성량으로 울 때는 보통 마지막 이유다. 오늘이 그랬다. 아내가 바로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다. 나도 궁금하긴 했지만 일단 아내가 나갔으니 그대로 있었다. 아내가 나가고 상황이 심각했으면 나를 깨웠을 텐데 그러지도 않았고, 들려오는 소리도 그냥 잔잔했다.


잠시 후 시윤이가 잠에서 깼다. 의도치 않게 허락된 아들과의 시간이었다. 요즘은 소윤이보다 시윤이가 스킨십에 더 후한 편이다. 소윤이는 이제 뭐랄까, 아빠를 대하는 다 큰 딸처럼 군다. 슬프게도. 스킨십도 선을 지켜서. 특히 뽀뽀를 할 때는 아주 정제된 뽀뽀만. 그에 비해 시윤이는 아직 날 것 그대로다.


“아빠아. 오늘 주말이에여어?”

“응, 주일”

“아빠아 오늘 회사 안 가져어?”

“응”


시윤이는 씨익 웃더니 거실로 나갔다. 시윤이는 아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누나에게 알렸고 소윤이는 바로 방에 들어와 내 위로 몸을 덮었다. 뽀뽀는 박해도 이런 건 거침이 없다.


어제 자기 전에 애들을 씻기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내일은 아침에 애들 머리라도 감겨야지’


이 생각이 실천하려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화장실에 가서 아이들을 불렀어야 했다. 어제의 생각을 아예 기억도 못 했다. 그래도 아예 늦게 일어난 건 아니어서 제법 여유롭게 준비를 했다. 보통 밥 먹여서 옷 입히기도 빠듯한 주일 아침에, 치즈볼까지 잔뜩 만들어 줄 만큼 여유가 있었다.


예배를 드리고 카페에 들러서 커피를 샀다. 카페로 가는 길에 시윤이가 말했다.


“내가 또오 이럴 줄 알았다아”


이제 애들도 어느 정도 안다. 아내와 나의 고정 동선을.


집에 가면 점심을 먹어야 했다.


“여보. 밥이 얼마나 있지?”

“글쎄. 기억이 안 나네”

“별로 없지 않나?”


아내와 나는 직접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같은 마음을 품었다는 걸 느꼈다.


‘아, 집에 가서 점심 차려 먹이기 귀찮은데’


밥이야 새로 해도 30분이면 하는 걸, 밥이 별로 없다는 핑계로 ‘뭐 먹을 게 없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아주 예전에 먹었던 ‘털래기’라는 음식이 먹고 싶다고 했다. 코로나 시국에 휴일 점심에 누가 그렇게 부지런히 나와서 밥을 먹겠냐고 생각하며 식당으로 갔다. 이럴 수가. 사람들이 번호표를 받아서 기다렸다.


“여보. 여기는 안 되겠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기다리는 건 둘째 치고 굳이 그 인파 속에서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집에 가서 밥이나 해 먹지 뭐”


라고 말하는 아내의 말에 조금도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집 근처 중국 음식점에 가기로 했다. 평온한 식사를 위해 가는 길에 서윤이 과자도 샀다. 다행히 서윤이는 식사 시간 내내 과자와 바나나를 먹으며 ‘얌전히’ 있어 줬다. 시윤이는 오늘도 아주 야무지게, 마지막 한 점까지 열심히 탕수육을 먹었다. 이제 짜장면을 먹어도 입 주변에 별로 묻히지 않는 소윤이를 볼 때마다 많이 컸다고 느낀다.


애들은 여전히 몰랐지만, 내일 연차를 냈다. 아내에게 다소 당당하게 얘기했다.


“여보. 내일 연차니까 오늘은 애들 두고 축구하러 갔다 올게”


사실 연차랑 상관없이 데리고 가도 되는데, 지난주에 애들이 너무 심심해했다. 게다가 오늘 날씨도 쌀쌀했고, 우중충했다. 둘이 앉아서 놀기에 뭔가 기분이 나는 날씨가 아니었다. 막상 가방을 챙겨서 나가려고 하니 소윤이와 시윤이가 아쉬워했다.


“그냥 따라갈 걸 그랬나”

“아빠. 저는 간다고 했잖아여어”


내일 연차라고 당장 오늘 혼자 셋을 보는 일이 쉬워지는 건 아니다. 힘든 건 그대로 힘들 뿐이다. 갔다 왔더니 아내는 애들 셋을 목욕도 시키고, 저녁으로 어묵탕도 끓였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여보. 괜찮았어?”

“어, 뭐. 힘들긴 했지만 괜찮아”


그냥 어묵탕이 아니었다. 꼬챙이에 어묵을 꽂은, 어디 식당에서 파는 웬만한 어묵탕보다 나은 요리였다. 소윤이, 시윤이와 엄마의 요리 실력을 극찬하며 맛있게 먹었다.


아내가 어묵탕을 끓이려고 주방에 서서 무의 하얀 부분이 단 맛인지, 초록 부분이 단 맛인지 곰곰이 생각하는데, 옆에서 소윤이가 묻지도 않았는데 얘기를 했다고 했다.


“엄마. 무는 하얀 부분이 땅속에 박혀 있는 거래여. 그래서 하얀 부분이 달고….”


그 외에도 좋은 무를 고르는 방법은 무엇인지, 어떤 무가 싱싱한 건지 등의 방법도 쭉 읊었다고 했다. 소윤이가 요즘 자주 읽는 책이 이유식, 유아식 책이다. 소파에 앉아서 매일 그걸 정독하더니 요리 지식이 쌓였나 보다. 요리하는 방법도 막 알려줄 때가 있다. 조금씩 요리 다운 요리도 좀 시켜 봐야겠다.


“아, 벌써 주말이 끝났다니”

“그러게. 주말이 다 갔네. 내일도 엄마 말씀 잘 듣고. 알았지?”


주말이 끝난 걸 아쉬워하는 아이들에게, 연기를 했다. 내일 아침에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아내와 아이들이 방에 들어가고 난 애들이 목욕하느라 화장실에 있던 욕조에 물을 받았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봤다. 피로가 싹 풀리는 듯한 기분이 반신욕 때문인지 내일 연차 때문인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좋았다. 애들을 재우고 나온 아내에게도 권했다. 아내도 들어가서 한참 동안 있다 나왔다.


“여보. 나 내일도 쉰다”

“아. 진짜 너무 좋다”


아내와 내일의 여유를 만끽하며 쉬었다. 밤이 깊어서 아내가 자러 들어가려고 할 때, 소윤이가 깨서 나왔다. 어떻게 하다 보니 바로 들여보내지 않고, 함께 소파에 앉아서 딱 지금 서윤이 정도 되었을 때의 사진과 영상을 한참 봤다.


“소윤아. 엄마가 지금 서윤이한테 하는 거랑 똑같지?”

“그러게여”


아내와 나에게는 너무 선명한 기억이고 정말 행복한 7년(소윤이의 인생)인데, 소윤이는 이제 그 기억이 점점 사라진다는 게 가끔 참 신기하다. 세포에는 깊이 박혔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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