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에게 나쁜 참모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마지막까지 히틀러를 보좌하며 단 하루에 그치긴 했지만 히틀러의 뒤를 이어 독일의 총통에 오른 인물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아돌프 히틀러보다 더 싫어했고 증오했던 인물이 바로 괴벨스라고 한다. 괴벨스는 미디어를 통한 대중 선동의 위험을 잘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괴벨스는 독일의 평범한 노동자 가정 출신이었다. 그는 어릴 적 몸도 약하였고 다리가 마비가 되는 등 불운한 시절을 보냈었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괴벨스는 열등감과 내성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이를 극복하고자 공부에 더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괴벨스는 성장하면서 민족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에 지원을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굽은 다리 때문에 전장에는 나가지 못하고 지원 업무를 하게 되었다.
1차 세계 대전이 폐전으로 끝나자 괴벨스는 실의에 빠지게 되었고, 더욱더 민족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나치당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히틀러가 괴벨스를 눈여겨보고 그를 베를린 지구당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베를린에는 나치당 조직이 없었던 상황이라 그는 당의 세력 확대라는 큰 책임을 맡게 된 것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괴벨스와 히틀러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괴벨스는 베를린에서 나치당의 세력 확장에 주력하였다. 히틀러는 이런 괴벨스의 노력을 알고 그를 당의 선전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괴벨스와 히틀러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괴벨스는 자신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들기 위해 선동적인 연설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치가 집권을 한 후 괴벨스는 국가 선전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는 히틀러나 괴벨스가 독일 국민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제일 먼저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괴벨스는 저렴한 라디오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보급하였으며, 당시 독일의 라디오 보급률은 70%를 육박했다.
또한 언론과 문화 예술 등 대중 매체를 활용하여 히틀러 우상화 작업을 하였으며, 국민들에게 자신들을 믿고 따르게끔 생각을 주입시키는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1943년 2월에 한 총력전 연설이다.
"독일 국민들이여 총력전을 원하는가?"
"여러분은 역사상 최대의 총력을 각오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우리의 지도자 히틀러를 믿고 따르겠는가?"
"여러분은 가장 힘겨운 과업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괴벨스는 단순한 질문으로 국민들에게 답변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점점 국민들에게
자신들이 의도하고자 하는 답을 듣기 위한 질문으로 빠져들게 하였으며, 결국 국민들이 괴벨스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유도한 후에 마지막으로,
"독일 국민들이여 일어서서 폭풍을 일으키자!"
란 연설로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독일 국가를 연설의 마지막에 들려줌으로써 국민들이 전쟁에 참전케 하는 효과를 발휘하였다. 실제 이렇게 참전한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괴벨스의 연설은 단순 반복에 의한 세뇌 홍보 전략을 사용했다. 세뇌식 선동정치는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 수 있다. 왜냐면 국민들은 자신들이 보고 듣는 것만을 믿기 때문이다.
‘우물 안 개구리’
라고 딱 그만큼만 알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공포정치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선동정치일 것이다. 공포정치는 억압을 통해 국민들을 지배하는 것이라 언젠가 억압에 대해 저항할 경우 바뀔 수 있지만, 선동정치는 국민들 스스로가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거나 포기하고 있기 때문에 저항할 마음조차 갖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선동정치는 국민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조정할 수 있는 방식이다. 더 심하게 말한다면 국민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놓는 것이다. 국민이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생각들을 갖지 못하게 만들고,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는 국민을 만들어서 언제든 자신들의 지지 세력화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괴벨스는 정치에서 핵심적 역할이 바로 선동정치라고 보았다. 그래서 교육과 홍보의 역할을 확대하였다. 과거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여성들의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얼핏 들으면 개화기 여성들의 교육에 앞장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성들이 일본식 교육을 받고, 일본식 사고를 해야만 자녀들에게도 일본에 대해 우호적으로 가르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도 식민 지배를 위해 교육을 활용했던 것이다.
괴벨스의 이런 활동은 학교, 직장, 군대에서 홍보와 교육을 통해 국민들을 세뇌시켜 나갔다. 특히 라디오 보급이 확대되면서 방송을 통한 연설 홍보는 더 탄력을 받게 되었으며, 독일 국민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히틀러와 괴벨스에 의해 세뇌되어 갔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당시에도 괴벨스는 폴란드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독일 국민들에게 폴란드 내 독일인들의 억압받는 상황을 홍보함으로써 오히려 독일 국민들에게 전쟁의 명분을 정당화시켰다.
또한 비 아리아인 즉 독일인을 제외한 인종 탄압에도 선동정치는 악용되었는데, 당시 유대인들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무차별적인 분노와 증오는 이런 선전, 선동 정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점점 독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괴벨스의 선동 정치는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괴벨스는 독일이 계속 승전을 하고 있다고 거짓으로 홍보를 하였으며, 국민들이 끝까지 싸울 것을 호소하였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독일이 정말로 이기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결국 독일 국민들은 패전의 상황이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나고 나서야 독일이 졌다는 것을 알았다.
점점 연합군이 자신들의 지휘부로 공격해 들어오자 히틀러는 괴벨스에게 총통의 자리를 물려주고 자살을 하였다. 그리고 괴벨스 또한 히틀러가 죽은 후 하루 뒤에 가족들과 함께 자살을 하였다.
히틀러의 최 측근으로 마지막까지 그의 곁에서 그를 보좌를 했던 괴벨스는 선전, 선동 정치가 악용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독일 국민들에게만 피해를 준 게 아니라 전 세계와 유대인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이다.
연설에 능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괴벨스가 그것을 좀 더 국가와 인류를 위해 사용했었더라면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인류를 사랑했던 인물로 남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PS : 직장 상사 또는 리더를 위해서 아니면 자신을 위해서 나쁜 제안을 한 적이 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