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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을 도와 한(漢) 나라를 건설한 소하, 장량, 한신

리더를 성공으로 이끈 참모

by 미운오리새끼 민

용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뛰어난 장수 밑에는 약한 병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리더와 참모 관계에서는 이 말이 꼭 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와 반대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리더가 너무 뛰어나면 그 밑에 참모의 역할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참모의 역할이 리더를 보좌하고 지원하는 역할인데 리더가 리드해 나가는 조직에서 참모의 역할은 단순 지원 업무 밖에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리더를 따라가느라 참모가 지쳐 떨어져 나갈 수 있다. 사실 이 경우에는 참모라고도 할 수 없는 역할이다.


하지만 반대로 리더가 뛰어나지 않은 경우 참모의 역할이 중요시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참모가 수많은 정책 제시와 조언, 그리고 충실히 뒷받침하더라도 리더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는 경우라면 그 밑에서 참모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 있다.


참모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경우란, 리더가 참모의 의견을 수렴하여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경우다. 이런 경우 리더와 참모 모두 성공할 수 있다. 즉, 서로 공생하며 나갈 때 리더와 참모 모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리더의 역량이 좀 부족하더라도 참모의 역량에 따라 성공하는 리더가 나오는 경우 중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에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었다. 유방은 패현의 작은 마을에서 건달 생활을 하며 지내다 정장(亭長)의 자리라는 하급 관리를 지냈다. 초기 유방 자신은 별 볼일 없었지만 세력을 확장하면서 소하, 장량, 한신 등 그를 성공으로 이끈 수많은 참모들의 도움을 받아 결국 대업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소하, 장량, 한신 등은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그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들이 유방의 다른 참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다음과 사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소하는 나라의 살림꾼 역할을 맡아 유방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에도 나라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국가 운영을 잘했으며, 초창기 전쟁에서 폐하고 돌아올 때마다 유방에게 다시 나가서 싸울 수 있도록 군수지원을 철저하게 준비했었다. 또한 소하는 인재를 알아보고, 그 인재를 적극적으로 유방에게 추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신이다. 한신이 유방의 군영을 떠났을 때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뒤쫓아 가 다시 유방에게로 되돌아올 수 있게 한 인물이다. 참모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가 훌륭한 인재를 알아보고 이를 주저 없이 리더에게 추천하는 것인데 소하는 이런 부분에서도 뛰어났었다.


소하는 전쟁 중 나라의 기틀을 잡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함양에 들어갔을 때 소하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진나라 황궁의 서적과 문서들을 챙기는 일이었다. 당시 누구도 그 일을 시킨 사람은 없었다. 다만 소하 자신이 본능적으로 장차 나라의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일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서적과 문서들은 훗날 한(漢) 나라의 제도와 문물, 양식, 예법 등의 기초가 되었다. 소하는 행정가로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완벽하게 처리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장량은 전체적인 판세를 가늠하며, 유방이 중국 통일이라는 큰 계획을 실천하도록 끊임없이 조언한 인물이다. 장량이 크게 주안점을 두었던 것은 민심을 얻는 방법이었다. 또한 결정적인 순간마다 적절한 대안을 갖고 유방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려 하였으며, 유방이 대업을 향해 가는 길에 일탈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대표적인 세 가지 사례가 있는데 첫 번째 사례가 유방이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에 먼저 도착하여 진 황제 영의 항복을 받고 옥새까지 넘겨받아 명실상부한 패자의 위치에 오르는 듯했다. 이에 고무된 유방은 진나라 황궁의 호

화로움과 창고에 쌓여있는 갖가지 보물들까지 보자 중국 통일이라는 생각은 잊어버리고 황궁에 머무르려고 하였다. 곁에 있던 번쾌가 이를 보고 유방에게 만류했지만 유방은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결국 번쾌는 장량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장량은 유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가 망하게 된 이유는 진나라의 폭정과 호화로운 사치, 무도함 때문에 결국 전국에서 봉기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폐단을 없애고자 힘겹게 여기까지 왔는데, 폐공이 처음의 뜻을 잊고 진의 모습을 답습하려고 한다면 진나라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관중의 왕으로 머물 것인지 중국 통일의 황제로 남을 것인지를 설파하였다. 유방은 장량의 이야기를 듣고 황궁과 창고를 폐쇄하고 약탈을 방지하여 민심을 안정시킨 다음 살인, 상해, 절도와 관련된 법률 세 가지 즉, 약법삼장(弱法三章)을 공표하였다. 그러자 민심은 자연스레 유방 쪽으로 기울어지게 됐다.


당시 장량에게는 함양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장차 항우가 함양에 들어올 것이며 결국 중국 통일은 항우와 유방의 싸움인데 지금 항우를 군사적으로 이기기는 힘들다는 판단하에 민심을 얻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런 바탕에는 항우와 유방의 처한 상황이나 두 사람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즉, 궁극적으로는 힘이 아니라 민심이 우선이라는 장량의 생각이 깔려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처럼 장량은 시종일관 시대 저류에 흐르고 있는 민심을 얻기 위한 정치에 노력하였으며, 개별 전투의 패배에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전쟁 전체 판도의 흐름을 파악하며, 대세를 장악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가였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민심을 얻는 자만이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장량의 전략은 전쟁을 통해 땅을 더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싸움에 이겨 땅을 얻는다 하더라도 민심을 얻지 못하면 그 땅은 영원히 유방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안민 정책은 유방이 민심을 얻는데 크게 기여했다.


두 번째 사례는 한신이 제나라를 평정하고 유방에게 자신을 제나라의 가(假)왕의 자리에 올려달라고 했을 때이다. 이때 유방은 화를 내며 한신이 무례하다 생각해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려고 했으나, 장량은 유방을 달래며 말했다.

“지금 한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한신은 항우의 편에 붙을 수도 있거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대업은 물 건너가게 될 것입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한신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내대장부가 가왕이 뭐냐 이왕 할 거면 진짜 왕을 해야지. 한신을 제나라 왕으로 봉하노라."

한신은 제나라 왕으로 봉해지자 그제야 유방을 도와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장량은 전략을 구사하기에 앞서 수많은 경우의 수를 충분히 검토하고, 최선의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집중하려고 했다.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작은 일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전체를 바라보며,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 내고, 상대방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몇 수 앞을 내다보려 했던 그 만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즉, 상대방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하는 것을 똑같이 행동한다면 상대방과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 있겠지만, 상대를 이길 수는 없다.

이런 관점에서 장량은 왜 한신이 제나라 가왕으로 봉해달라고 하는지 그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지 않을 경우 한신의 행동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 그때 유방이 장량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한신은 괴통의 말에 따라 자기 스스로 제나라 왕으로 등극하여 유방, 항우와 함께 중국을 삼분으로 분할하여 통치하였을 것이다. 유방이 항우를 상대하기도 벅찬 상황이었고, 항우 또한 세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만만치 않은 세력을 갖고 있었던 한신이 최후의 승자가 됐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장량은 이처럼 전체적인 큰 틀은 유지하면서 상황에 따라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기에 항우를 물리친 이후 바로 한신에게서 제나라 왕의 인수를 거둬들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례는 항우와 유방이 중국을 양분하기로 화의를 맺고 회군을 선택하였을 때이다. 유방은 싸움이 장기화되고 자신의 부모까지 역류되어 있었던 상황에서 더 이상 싸움을 계속할 경우 자신의 안위마저도 위태롭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만큼 항우가 무서웠던 것이다. 유방은 중국 전체를 통일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절반만이라도 자신만의 제국을 만들 수 있는 선택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장량은 유방의 결정을 뒤집는 말을 하였다.

"지금 항우를 공격하지 않고 회군한다면 항우는 자신의 근거지로 돌아가 힘을 비축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히 통일을 이룰 기회는 사라지게 될 것이며, 오히려 한나라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한신과 함께 총공격을 하면 항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유방은 통일의 기회가 사라진다는 장량의 말에 총공격을 감행하여 결국 대업을 이루게 되었다.


비록 한나라 창업과정에서 장량의 역할이 한신이나 소하에 비해 미약하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전체를 바라보며 전략을 구사할 줄 아는 능력과, 리더가 결정적인 선택의 기로에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장량의 역할은 한신이나 소하보다 크다면 크지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한신은 초반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소하를 만나면서 그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한신은 대장군에 임명되자마자 그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함곡관 안쪽에 위치하고 있던 한나라가 관중을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것, 위나라와 황하 이남의 땅을 평정하여 초나라가 서쪽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한 것, 조나라와 제나라를 평정하고 제나라의 왕이 되어 유방이나 항우와 대등한 위치까지 간 점 등은 그의 능력이 단순히 무장의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신의 용병술은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 예가 조나라와의 싸움에서 사용한 배수진(背水陣) 전략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물을 바라보고 진영을 설치는 했어도 물을 등지고 진을 치는 전략은 병법서에 존재하지 않았다. 한신이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그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이해가 된다.

유방이 항우에게 대패를 한 후 많은 병력을 잃은 상황이었다. 이후 유방은 전격적으로 한신에게 가서 그의 인장을 빼앗고 한신의 정예병을 자신의 휘하로 삼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한신은 결국 새로운 병사들을 모집해야 했으며, 조나라와 전쟁에서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을 갖고 싸움에 임해야 했다. 병법에 능하지 않은 병사들은 뒤로 보이는 강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한신은 바로 이를 이용하여 배수진의 전략을 썼던 것이다.


유방이 정예병을 갖고도 항우에게 매번 패해 달아나는 것이 일이었다면, 반대로 한신은 전쟁터에서 전략을 구사하면 항상 승리하는 장군이었기에 한신이 없었다면 유방의 대업 달성은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PS : 나보다 약간 못한 리더를 만났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갖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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