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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Feb 02. 2021

경기 유랑 안산 편 4-2(선감학원)

대부도에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대부도 역시 강화도와 마찬가지로 간척의 역사가 무척 오래되었다. 갯벌이 많은 섬 특성상 간척을 하기 편했고, 간척으로 확보된 넓은 들판은 대부도의 주민들이 어업외에 농업을 통해 풍족한 생활의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 


대부도와 지금은 한 몸이지만 시화방조제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선감도라는 섬이 존재했다(지금은 선감동이라는 이름만 남아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평화로운 동네지만 일제시대에 큰 아픔을 간직한 역사가 남아있다.

어느덧 이정표가 나오고 조금 시골길을 들어가면 옛날 학교를 개조한 경기창작센터가 푸릇푸릇 잔디밭 운동장과 함께 나타난다. 지금은 경기도와 예술인들을 지원하고 주민들의 문화 참여를 유도하는 문화센터로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무시무시한 선감학원의 일부였다고 한다. 일제시대부터 1982년까지 무려 40년간 존재했었고, 선감도의 거의 대부분의 주민들을 내쫓고 섬 전체를 수용소를 만들었다.


선감학원은 일제가 거리의 불량배나 부랑아들을 교화한다는 면목 하에 수백 명들의 소년들을 전국 각지에서 잡아와서 노동착취를 시킨 비극의 현장이다. 처음에는 절도나 폭행 등을 일으킨 소년들을 잡아왔으나 점차 본색을 드러내면서 항일 독립 행위,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아무런 이유 없이 잡혀온 청년들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학교와 동일한 수업을 실시했지만, 선감원에 온 소년들은 공부는커녕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잘못을 하면 처벌의 일환으로 끝을 뾰족하게 깎은 대나무를 손톱 밑에 끼워 넣는 고문을 하였다. 신념으로 가득한 독립운동가들도 견디기 힘들었던 고문을 어린애들을 상대로 자행한 것이다. 게다가 섬이어서 소년들은 달리 나갈 방법도 없었다.


탈출을 시도해도 이 지역이 조류가 심하고 유속이 빠르기 때문에 파도에 휩쓸려서 죽은 소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2차 대전이 절정으로 치달았을 땐 선감학원의 소년들도 강제로 징병에 동원되었다. 광복 이후 관리권이 경기도로 이전되었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기 역시 거리의 부랑아들을 모아 강제로 수용되었다. 삼청교육대와 형제복지원과 마찬가지로 무고한 청년들이 강제로 끌려들어 갔고, 정부는 선감학원을 모범적 복지시설이라고 적극 홍보했다.


현재는 이런 아픔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선감학원 뒤편에 ‘선감 역사박물관’을 만들었다. 컨테이너 형식의 2층 건물로 구성되었고, 내부에는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는 사진자료를 볼 수 있다. 사진을 천천히 둘러보며 그때의 아픔을 되새겨 본다. 국가가 먼저 앞장서서 폭력을 자행하는 비극의 시대가 몇십 년 전까지 존재했다. 선감학원은 당시 이곳의 원장의 아들이었던 이하라 히로미츠에 의해 알려졌다고 한다. 이분이 아니었다면 이 사실은 영원히 해무 속에 묻힐 수도 있었다.


사진과 각종 물품 등을 둘러보며 성인이 되기 전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을 그들의 아픔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당시 수용자는 400명 정도인데 탈출하려다가 죽고, 각종 가혹행위에 시달려서 죽고 해서 생존자는 100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300명의 억울한 소년들이 매장된 묘가 바로 뒤편에 남아있다. 10분 동안 무거운 발을 이끌고 천천히 걸어가 보니 봉분이 없는 풀만 무성히 자라 있는 장소가 나타나는데 그곳이 300명의 소년의 묘란다. 죽어서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 아픔에 차마 말이 나오지 못했다. 이런 장소가 널리 알려지고 많이 기억되어 앞으로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많이 찾아주셨음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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