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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Oct 18. 2020

경기 유랑 연천 편 4-1 (경순왕릉)

망국의 한탄

경기도 최북단 휴전선과 맞닿아 있는 연천은 위치만큼이나 사람들의 이목을 덜 받는 동네이기에 예나 지금이나 양지보다는 음지에서 민간인들보다는 군인들을 더 쉽게 보지만 그러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신라, 고려 마지막의 흔적이 이 도시에 남아있다.

흔히 왕조의 시작 또는 전성기를 담은 유적과 유물은 왕조의 수도였던 도시나 박물관에 주목을 받는 장소에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만 왕국의 마지막 흔적들은 민통선 끝자락에서 가끔 오는 방문객의 손길만 기다리고 있다. 고구려의 당당한 풍채를 엿볼 수 있는 산 뒷자락에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왕릉이 자리 잡고 있다.

신라가 경순왕까지 해서 56명의 왕이 재위를 이어갔지만, 경순왕만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영남지역도 아닌 연천에 묘역을 마련했다. 그것도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에 자리 잡아서.... 주차장에서 언덕길을 10분 정도 올라가면 비교적 좁은 터에 왕릉과 비각이 쓸쓸하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55대 왕 경애왕이 927년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은 뒤 억지로 왕에 올랐지만 이미 왕국은 경주 인근으로 쪼그라들었고, 사실상 망국의 길로 들어선 지 이미 오래였다.

후백제와 고려가 삼국통일을 위해 패권다툼을 하는 동안 신라가 할 일은 어느 나라에 붙어서 이 나라의 백성과 국토를 안전하게 보장하는 절차만 남은 셈인데 당연하게도 신라에 침입해 많은 피해와 치욕을 안겨준 후백제로 귀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이미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 들어 유화정책을 펼친 고려를 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935년 경순왕은 마의태자와 여러 신하를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 왕건에게 평화롭게 나라를 넘겨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으며 천년의 역사와 삼국통일의 진한 향기만을 남긴 채 신라는 이렇게 문을 닫았다. 고려에 나라를 귀부 한 경순왕은 고려 태자보다 높은 지위인 정승 공에 봉해지는 한편에 유화 궁을 하사 받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왕건의 딸과 결혼했고, 고려의 삼국통일 이후에도 정말 오래 살아 귀부 한 지 43년인 978년(경종 3년)에 세상을 떠났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드는 것은 왜 경순왕의 릉이 개성도 경주도 아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연천에 묻히게 된 것인가? 연천에서 개성이 생각보다 멀지 않다. 그 점을 생각하면 감이 조금 잡히는데 전하는 이야기론 개경에서 사망한 경순왕은 원래 경주에 묻히길 원했고, 상여가 경주로 향하던 와중에 연천 부근에서 못 가게 막은 것이다. 이유인즉슨 “왕의 릉은 수도 백리로 나갈 수 없다”이지만 실은 신라의 옛 유민들이 경순왕을 매개체로 다시 부흥운동이 일어날까 두려워서 이다. 겉으론 큰 벼슬을 내리고 편히 살게 해 주었지만, 살아가는 동안 감시의 눈초리와 갖은 견제는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망국 군주의 비애라고 할까?

실제로 경순왕의 릉은 오랜 세월 잊혀 있다가 조선 후기에 와서 후손들이 왕릉 주변에서 묘지석을 되찾으며 발견한 거라고 한다. 비석의 내용은 전부 마모되어 한 글자도 읽기 어려운 상태였지만 마음의 눈으로 한 자 한 자 만들어 본다. 신라의 마지막을 연천에서 마무리 짓고 여기서 머지않은 곳에 고려의 흔적도 남아있으니 서둘러 찾아가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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