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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Nov 27. 2020

경기 유랑 강화도 편 3-6(고려궁지)

강화읍, 강화도의 중심

고려왕조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수도로 욺 겨 39년간 머물렀고, 조선 후기 행궁과 강화유수부의 역할도 수행했었던 고려궁터에 도착했다. 옛날 궁터의 자취는 온데간데없고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고목들만 쓸쓸하게 남았다. 너무나 황량한 풍경이었지만 고려궁지가 자리한 터도 궁지라고 하기엔 다소 좁고 옹색해서 과연 실제로 고려왕이 여기에서 살았을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현재는 고려왕조의 터에 듬성듬성 조선시대 관청의 건물들이 남아있는데, 우선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동헌 건물로 발걸음을 욺 겼다. 고려궁지에 있는 관아 건물로 오늘날로 비유하면 군청과 같은데, 당시 강화도는 개성, 수원, 광주와 함께 유수부의 지위에 있었으므로 그 지위는 정말 특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헌 건물만 남아있어 그 위세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아쉬운 대로 내부는 그 당시 강화유수와 이방 등 관리들을 마네킹으로 만들어 재현을 해서 그 당시 강화유수부의 위상을 조금 짐작하게 했다.

고려궁지 경내에 단지 동헌 건물만 있었다면 평범한 관아지에 불과했겠지만, 터의 중앙에 있는 외규장각은 여기가 정말 중요한 장소임을 알려주고 있다.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 등 왕실 관계 서적을 보관한 장소다. 그러나 프랑스가 침입한 병인양요 때 외규장각을 약탈하면서 의궤를 비롯한 서적을 가지고 갔으며 얼마 전까지 의궤 반환 문제로 프랑스 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2010년 반환을 약속하긴 했지만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임대 형식이라 무척 아쉬웠다. 제국주의의 횡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재 외규장각은 다시 복원되어 내부를 의궤 관련 전시실로 꾸며져 있다. 조선 왕조의 치밀한 기록 문화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좋은 기회였다. 특히 <영조 정순 후 가례도감 반차도>라 불리는 왕실 결혼식을 담은 길쭉한 화폭에 그려 넣어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을 등장시킨 의궤가 있다. 전시실 내부에 그걸 모형으로 재현해 놓아 더욱 실감 나게 그 시대상을 이해했었다.

외규장각 뒤편에 있는 계단을 따라 터가 남아있는 허허벌판으로 올라가 본다. 고려궁지의 끝자락에 올라가니 확실히 전체적인 지역이 조망되면서 그 당시 권력자들이 왜 여기를 궁으로 택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터는 밑에서 본 것보다 확실히 넓었고, 개성의 만월대와 비슷한 입지를 지녔다고 하니 확실히 고려궁터가 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밖에도 강화읍의 시간을 알려주던 강화동종과 이방청 등 소소한 볼거리가 몇 개 더 있었지만 나에게는 터 곳곳에 터줏대감으로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기억에 남는다. 은행나무길을 걸으며 옛날 고려 궁궐에 자리했을 신하와 왕들의 대화들, 고향을 버리고 섬으로 도망친 사람들의 회환들이 읽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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