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모두가 첫날처럼』, 문학동네, 2023
내 말을 듣고 박준의 시집을 사봤다는 너의 메시지가 반가웠어. 누군가와 같은 결을 가지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은 흔치 않은 만큼 즐겁고, 우리는 영화나 전시의 감상을 나누면서 그런 순간을 경험하곤 했잖아. 내가 좋아하는 걸 너도 좋아할 거라는 자신이 없어서 그동안 무언가 추천하는 일은 드물었는데 네 발로 시에 입문하다니. 이건 기회다 싶었지. 추천하는 시가 있냐고 물어보며 그 부분은 더 경건하게 읽어볼게,라는 너의 말에 열세 편의 시를 찍어서 보냈지만 실은 성에 차지 않았어.
중학교 때 좀 노는 애들만 가는 줄 알았던 에뛰드에 쭈뼛대며 들어가 셰도며 틴트를 골라 보는 걸로 시작해서 고등학생 때는 명동이며 홍대라는 곳에서 스티커 사진도 찍어보고, 성인이 되어서는 오락실에서 펌프도 해보고. 네 손에 이끌려서 처음 해본 게 꽤 많지. 혼자라면 절대 시도해보지 않았을 것들이야. 하고 싶거나 가고 싶지 않다는 나를 기어이 데려다가 결국 나도 같이 즐기는 걸 보며 흐뭇해하곤 했던 너의 얼굴이 떠올라. 분명 즐거웠는데 사실 묘하게 분했어.
그러니 이 글은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다 해도 정독해 줘. 다 읽고 너도 시라는 장르를 좋아하게 된다면 나도 그때의 너와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 테니까. 박준 시는 문장이 어렵다고 했었지. 입문용으로 적절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더 착하고 소화가 잘 되는 시집을 골라왔어. 작년에 김용택 할아버지가 쓴 시집이야. 마음이 뾰족해질 때 처방받기 좋은 시들이 아주 많아.
안녕하세요
제가 달맞이꽃이에요
아침 안개 속에 있다가 부지런한 시인에게 들켰어요
안개 속에서는 말소리를 죽여야 해요
소리가 멀리 가거든요
조심하세요
나는 곧 꽃잎을 닫을 시간입니다
안녕!
근데,
내가 사랑한다고 지금 조금 크게 부르면 안 되나요?
- 「아침에 인사」, 『모두가 첫날처럼』, 문학동네, 2023
미술은 전시장, 영화는 영화관, 음악과 춤은 공연장이라는 주요한 감상 공간에 여럿이서 함께 즐길 수 있는 예술인 반면 문학은 그렇지 않아. 감상하는 다수, 즉 관객을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이지. 문학은 관객이 지워진 장르야. 영화나 음악은 노트북이나 핸드폰으로 틀어놓고 여럿이 동시에 같이 감상하기 수월하지만 책은 누군가와 같이 들고 보기는 힘들어. 독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혼자가 되어야 해. 예컨대 이 시를 읽으면서는 “근데, / 내가 사랑한다고 지금 조금 크게 부르면 안 되나요?”라고 말하는 달맞이꽃의 속삭임은 혼자 있을 때 더 잘 들을 수 있지.
문학에는 관객뿐만 아니라 그림도 소리도 영상도 없어. 예술 중에서 가장 많이 '소거'하는 장르야. 특히 시가 그렇지. 한 편에 글 자체도 적고 여백이 많아. 그래서 산문 혹은 소설과 시의 다름을 우리는 외형만으로도 쉽게 구분할 수 있어.
나무는 정면이 없다
바라보는 쪽이 정면이다
나무는 언제 보아도
완성되어 있고
언제 보아도 다르다
(···)
달이 뜨면 달이 뜨는 나무가 되고
새가 날아와 앉으면
새가 앉은 나무가 된다
- 「새들의 시」 중, 같은 책
이 시에서는 연 사이를 길게 띄웠어. 띄워진 연과 연 사이에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소리가 들리고 나뭇잎 냄새도 나고, 독자들은 각자의 나무를 떠올리며 머릿속이 푸르러질 거야. 상상 속 나무에는 달이 뜨고 새가 앉기도 해. 의도적으로 간격을 둬서 이런 풍경들이 그려지기에 충분한 시간을 주지.
음악이나 영상은 본래 속도보다 느리게 재생하면 의도를 해치는 반면 문학은 독자가 자신만의 속도를 가지고 읽을 수 있는 자유가 열려 있어. 특히 시는 문학 중에서 가장 ‘잘 안 읽히게끔’ 연출을 하는 모순된 장르이기도 해. 위의 시처럼 행의 간격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가독성 떨어지는 서체를 사용하기도 하고, 줄을 바꿔서 상황이나 감정을 파악하는 것을 지연시키기도 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원인과 결과가 맞물리며 사건이 벌어지는 소설 같은 서사문학이 주는 속도감도 없어. 덕분에 행과 행 사이를 마음껏 서행할 수 있지. 우리는 천천히 읽으며 단어나 조사 하나하나에 머물기도 하고 머뭇거리는 화자의 감정에 아주 가까이 이입해보기도 해.
조금 더 걸어와, 그랬더니
네가 조금 더 걸어왔어
웃으면서
나도 걸어갔지
더 와봐, 그러면서
더 가까이
조금 더
갔지
내가
거기야, 그랬는데
한 발 더 왔어
- 「웃으면서 한 걸음 더」 중, 같은 책
나는
아무 일이 없습니다
평생 그랬습니다
사람이 사는 데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내게 무슨 일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다 있는 그 일일 것입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오늘은 눈이 옵니다 나는
찾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시는 달 아래 있습니다
어느 날도
오늘 같은 날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말이 싫은 시가
나는 아름답습니다
- 「어느 날도 오늘 같은 날은 없다」, 같은 책
나는 한 문장을 채 마무리하기 전에 다음 행에 가 있는 말을 따라가며 뒤늦게 멈칫멈칫하는 화자의 목소리를 들어. 내 앞의 그 애가 몇 걸음 더 다가오는 그 짧은 순간을 몇 행이나 나눠서 그려내는 건 사랑스럽고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 오늘은 눈이 옵니다 나는 / 찾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더듬대는 건 안쓰러워.
“말이 싫은 시가 / 나는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떤 시는 할 말을 다 하지 않아. 인생이란 그래서 “아무 일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인지, 아니면 “어느 날도 / 오늘 같은 날이 없다”고 할 만큼 특별한 것인지 설명하지 않고 흐지부지 끝내버리지. 하루라는 단위는 하나하나 뜯어보면 특별하지만 일평생을 조감해보면 “누구에게나 다 있는 그 일”의 연속이라는 말인 걸까. 말을 하는 의도도 어디 사는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확실치 않은 이 아른아른함이 싫지 않다면 너는 시를 좋아하게 된 거야.
시는 무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맞아 무능해!”라고 명랑하게 말해도 좋을, 시의 이런 느슨함을 사랑해. 마치 우리가 서로에게 유익한 사이가 아니어도 서로를 좋아할 수 있는 것처럼. 서로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도 서로를 자랑할 수 있는 것처럼. 내가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 관계를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하네. 우리는 만남이나 소식을 재촉하지 않고 서로의 게으름이나 경솔함에도 관대했잖아. 서로를 제일 잘 위로해 줄 수 있으면서도 가장 힘들 때 서로를 찾기보다 다 지나고 나서 “이런 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 하며 덤덤하게 넘긴 일들이 더 많은 사이지.
친구는 가족처럼 좋으나 싫으나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는 사이는 아니야. 연인처럼 의무적으로 관심이라는 책임을 다해야 하는 관계와도 다르지. 문법에서 조금 벗어나도 관대한 시적인 허용처럼 우정이란 이렇다 하고 정해놓은 기준이 없어도 다 친구로 쳐주잖아. 그래서 더 쉽게 느슨해질 수 있고. 같은 성씨밖에는 닮은 게 없는 우리 사이의 느슨함을 이어주는 게 뭘까 생각해보면 작년 이맘때 앉아있던 남성역 어둑한 피자집이 생각나.
빔프로젝터로 틀어놓은 해외축구를 배경으로 우리가 같이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저녁 말이야. 그해 최고의 영화를 나는 <헤어질 결심>으로 너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꼽았었지. 그리고 둘이 두 번째로 꼽은 영화는 각자가 최고의 영화로 꼽은 그 영화였고. 우린 잘 만든 영화를 보고 감탄하는 지점이 비슷해. 별로인 영화를 보고 한숨 쉬고 싶은 지점은 거의 똑같고 말야. 우리는 치밀하고 세련된 연출을 칭찬하는 것으로도 K-신파의 지지부진한 전개를 신랄하게 욕하는 것으로도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또 우리는 좋은 걸 교환하는 사이이기도 하지. 너는 내가 첫 번째 회사를 퇴사하기로 결심하는 걸 도와주고 나는 네게 눈치 없이 플러팅 하는 남자 A와 손절할 수 있게 도와줬던 것처럼. 회화 전시와 80년대 일본 시티팝도 너를 따라 좋아하게 됐으니까 너도 시가 읽고 싶어진다면 좋겠어. 그래서 어둑한 피자집에서 다시 만나 얘기할 거리가 많아졌으면 좋겠고. 대화가 옆길로 새면 다음의 퇴사나 다음의 손절을 도울 수도 있겠지. 그때는 며칠 지난 생일을 느슨하게 축하하며 이 시집을 선물할게. 우리 오래 친구하자.
(2023.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