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 2021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라는 노래 가사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스무 살의 저는 이 가사가 안타까운 진실이라고 생각했어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오늘 있지만 내일 없을 수도 있는, 일관성을 보장할 수 없는 ‘어쩔 수 없음’의 영역이라고요. 하지만 스물여덟 살의 유부녀 유희선은 이 노래의 화자에게 딱밤을 때려주고 싶어요. 애송이 녀석. 사랑을 노력하는 일이 뭐 그렇게 처량한 일이라고. 그것만큼 숭고한 일이 어디 있다고.
올해 가장 즐겁게 읽은 비문학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인데요. 하필 저는 신혼이고 표지에는 입술 모양이 분홍색으로 크게 그려져 있어서 꺼내 읽을 때면 괜히 눈치가 보이더라고요. 제목 때문에 오해하실 수 있지만 이 책은 연애 조언서도 아니고 어떻게 하면 사랑받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지 알려주는 자기개발서도 아니에요. ‘사랑을 노력하라’는 간단한 한 문장을 230페이지에 걸쳐 풀어놓은 철학서랍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배우고 싶다면 우리는 다른 기술, 예컨대 음악이나 그림이나 건축, 또는 의학이나 공학 기술을 배우려고 할 때 거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18쪽
작가 에리히 프롬은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는데요.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숙달하는 거래요. 예술 혹은 학술적인 분야처럼 잘하기 위해서는 이론과 실전을 갈고닦아야 하고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시간을 쏟고 관심을 가져야 하죠.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사랑이 인생의 최대 관심사인 사람은 바로 주임님이에요.
유능한 기타리스트라면 그가 10만 원짜리 콜트 기타를 치든, 1,000만 원짜리 깁슨 기타를 치든 그 악기의 최대 성능을 끌어내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할 수 있을 거예요. 유능한 화가라면 문구점에서 파는 수채화 물감을 쓰든 화방에서 수입한 고가 물감을 쓰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고요. 마찬가지로 유능한 사랑의 기술자라면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 친하지 않거나 매력적이지 않대도 사랑해내겠죠.
주임님을 사랑의 기술자라고 불러도 될까요. 저의 입사 첫날(그날 처음 봐서 친할 리 없음), 하필 사내 예배 시간에 지각해 허둥대는 제 옆에서(매력 있을 리 없음) 차분하게 찬양 악보를 띄운 핸드폰을 다정하게 밀어주셨잖아요. 아, 좋은 사람이다, 직감하긴 했지만 비범할 정도로 상냥한 분인 줄은 몰랐죠. 그날 책상에는 빨간 선물박스에 포장된 사무도구 세트가 준비되어 있었고 주임님은 분홍색 꽃다발을 안겨주시며 함께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그날 ‘환대’의 의인화를 본 것만 같았어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임님은 회사에 새로운 사람이 오면 첫날 꼭 카페에 데려갔죠. 그 사람이 다른 부서에 있는 사람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요. 깊은 관심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마음을 담아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꽃다발이 배송되는 날이면 큰 다발을 풀어헤쳐서 더 작은 다발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다른 직원들 자리에 꽂아주셨고요. 심지어 초콜릿 같은 간식을 직접 만들어 모든 직원들이 먹을 수 있도록 탕비실에 가져다 놓을 때도 종종 있었어요. 그날의 충격이 떠오르네요. (‘저분은... 회사 사람들한테…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으실까?’) 그런 사랑은 정말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요? 저는 그런 주임님의 수고를 볼 때마다 사랑이라는 명사가 얼마나 다양한 동사로 분화될 수 있는지를 체감했어요.
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 가장 광범하게 퍼져 있는 오해는 준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는 오해이다.
(…) 준다는 것은 부자임을 의미한다.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자가 부자이다.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안달을 하는 자는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많이 갖고 있더라도 가난한 사람, 가난해진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자이다. 그는 자기를 남에게 줄 수 있는 자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생존에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모든 것을 빼앗긴 자만이 뭔가를 주는 행위를 즐기지 못할 것이다.
- 같은 책, 43-44쪽
꽃이든 간식이든 커피든 손편지든, 돈과 시간이 드는 것들을 건네는 주임님은 충만해 보였어요. 주임님은 많이 가지지 않아도 본인이 가진 만큼에 자족하고 행복해하는 사람이 늘 부러웠다고 하셨죠. 하지만 저는 자족하는 사람보다 한 수 위는 기쁘게 주는 사람인 것 같아요. 주임님처럼요. 더 가지고 싶은 욕심도 없고 자족하지만, 가진 만큼에서 손해를 보면 금세 인색해지고 마음이 빈곤해지는 사람도 있거든요. 저처럼요. 주임님을 보면 제 머릿속의 계산기를 꺼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손해보지 않으려 끙끙대는 대신 단순하게 주는 삶이 더 자유로워 보였거든요.
그리고 주임님께는 만져지는 것만 받지 않았죠. 정확한 칭찬, 세밀한 질문, 일관된 친절, 호불호로 쉽게 가르고 선을 그을 수도 있는 타인의 개성에 대한 이해, 부정적인 대화의 방향을 생산적인 쪽으로 틀었던 진실된 격려…. 주임님은 정말 다양한 사랑의 기술을 가지신 분이었어요. 하지만 글을 계속 이렇게 이어나가면 병렬식 예찬이 될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할게요. 우리의 이별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니까요.
이 책에서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가지는 ‘불안’이라는 정서의 기원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해요. 고전 중의 고전인 창세기에서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가 창조주가 금지한 선악과를 먹잖아요. 그들은 선악과를 먹자마자 이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서로의 벗은 몸을 보고 수치스러워하죠. 에리히 프롬은 그들이 수치심을 느낀 이유는 서로가 다른 성(性)에 속한다는 것, 즉 서로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요.
신이 누가 선악과를 먹었는지 질문할 때, 그들은 금기를 어긴 것을 반성하는 대신 서로를 고발해요. 이들은 선악과를 먹고 분별력을 얻기 전에, 즉 너와 나를 동일한 하나로 인지했을 때에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어요.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쉽고 당연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서로가 분리된 각각의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자 ‘나’를 보호하기 위해 ‘너’를 버리죠. 이 시기의 인류는 ‘나’만을 사랑할 수 있을 뿐 아직 분리된 ‘너’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거예요. 즉 인간이 분리된 채 사랑으로 결합되지 못하는 데서 죄책감, 불안, 수치와 같은 감정이 발생한다는 거죠.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 같은 책, 40쪽
미숙한 사랑은 너와 내가 같은 하나라서 사랑하는 것이고, 성숙한 사랑은 너와 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며, 원숙한 사랑은 바로 그 다름으로 인해서 오롯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저는 오늘 그 사랑의 경지를 조금 맛본 것 같아요. 주임님이 더 이상 저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지 않아도, 주임님만이 갈 수 있는 길을 찾아 떠나는 그 여정까지를 기쁘게 응원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미련 없이 심장이 뛰는 곳으로 가는 주임님이 서운하기보다 사랑스럽게 느껴지니까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아주 좋은 이별을 했네요. 예의상 눈물을 짜냈던 이별도 있는데요. 이렇게 아쉬움 없는 헤어짐이라면 애써 슬프지 않아도 되겠더라고요.
제 친구가 언젠가 대학 입시 면접 얘기를 해준 적이 있어요.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그 친구에게 면접관이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인지 물어봤대요. 친구는 당황하지 않고 “저는 책보다는 사람에게서 배웁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했어요. 저는 책을 몇 권 읽지만, 그래서 무언가가 제 안에 쌓여 간다고 믿고 싶지만, 제가 사는 모습을 보면 정말 배우고 있나 싶어요.
사실 책의 문장에 기대어 글을 쓰면서 제가 얼마나 거짓말을 잘하는지, 괜찮은 사람인 척을 잘하는지 알았거든요. 좋은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제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어요. 제 글은 착각의 힘으로 써왔다고 해도 맞을 거예요. 하지만 책에 비해 사람은 얼마나 생동감 넘치는 교보재인가요. 좋은 사람의 옆에서 그의 말이며 행동을 보고 들으면 그에 비해 나의 말은 얼마나 얕고 나의 행동은 얼마나 무심한지 가까이 깨닫게 되잖아요.
이제는 주임님을 가까이서 자주 보지는 못하겠지만 저는 사랑의 명장이자 좋은 인간 교재였던 주임님의 말과 행동을 자주 생각할 것 같아요. 주임님이라면 이 사람에게 어떻게 질문했을까, 지금 대화의 방향이 뒷담으로 빠지고 있는데 주임님은 어떻게 분위기를 전환했을까, 남에 대한 비난에 맞장구치지 않고도 이 사람에게 어떻게 공감해 줄 수 있을까, 하고요.
어떤 기술을 배우는 조건은 기술 습득에 대한 ‘최고의 관심’이다. … 우리가 어떤 기술에 숙달하려면 삶 전체를 이 기술에 바치거나 적어도 이 기술과 관련시켜야 한다. 자기 자신이 기술 훈련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사랑의 기술에 대해서 이 말은, 이 기술 분야에서 명장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삶의 모든 국면을 통해 훈련, 정신 집중, 인내를 ‘실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 같은 책, 159-160쪽
주임님은 사랑하기 위해 이 회사에 왔다고 하셨는데, 오늘 회사의 모두가 주임님께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혹은 배웠다고 한 걸 보니 사랑의 기술 분야에서 ‘명장이 되려는 야망'에 아주 가까워지신 것 같네요. 이글이글하고 뜨거운 야망이 아니라 아주 따뜻하고 부드러운 야망에요. 저는 아직 사랑의 견습생 정도가 되겠지만요. 마음과 팔이 닿는 곳까지 사랑을 노력했던 주임님을 떠올리면 저도 마음의 면적을 넓히며, 더 멀리까지 팔을 뻗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더욱 명장이 되어 다시 만나요.
(2023.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