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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선 Jun 17.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읽을 우리에게 | 슬픔의 거리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나는 아름답고 괴로운 책을 읽으면 너와 함께 보았던 어느 날의 연극이 떠올라. 동급생에게 맞고 들어오는 중학생, 오토바이를 타고 치킨을 배달하는 고등학생, 돈을 꿔서라도 또래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명품 신발을 사야만 하는 청소년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였어. 배우들이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드는 순간, 관객은 비로소 이 연극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돼. 하지만 그날의 연극에는 인사도, 커튼콜도 없었지. 극장을 나오며 커튼을 내리지 않은 현실에서 여전히 그런 아이들이 있음이 나는 자꾸만 생각이 났어.


  탄산음료식 전개와 개운한 엔딩은 대개 흡족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현실을 향해 문을 꽉 닫지만, 어떤 텍스트는 닫히지 않은 틈을 남기곤 해. 그 틈으로 텍스트 바깥에 있는 현실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나는 한동안 그런 책을 읽지 못했어. 우리 앞에 치러야 할 고시와 쳐내야 할 업무만으로도, 뉴스와 기사에서 쏟아지는 가해와 피해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바빠지고 나빠지잖아.


  나 이제 문학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살아도 살아져.


  졸업하고 나서 네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었지. 이 말은 여전히 맞아. 책을 펼쳐 읽지 않아도 생활의 프로세스에 아무런 제동이 걸리지 않지. 하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걸 하는 게 사랑이잖아. 당신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건 필요지만, 당신 없이도 살 수 있지만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사랑인 거잖아. 책에 기대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는 건 내가 이 사랑을 다시 시작했다는 뜻이야.


  우리는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아지지. 내 동생이 얼마나 대단한지 내 친구가 얼마나 똑똑한지 내 남편이 얼마나 다정한지 구체적으로 얘기하고 싶어져. 오늘은 문학이란 걸 더 잘 설명하고 싶어서 내가 아는 가장 비참하고 아름다운 소설의 문장들을 데려왔어.



"흰빛이 스러지며 물이 되어 살갗에 맺혔다. (...) 이런 섬세한 조직을 가진 건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차갑고 가벼운 것은. 녹아 자신을 잃는 순간까지 부드러운 것은.

이상한 열정에 사로잡혀 나는 눈 한 줌을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손바닥 위에 놓인 눈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손바닥이 연한 분홍빛으로 부푸는 동안, 내 열기를 빨아들인 눈이 세상에서 가장 연한 얼음이 되었다.

잊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부드러움을 잊지 않겠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186쪽


"찰랑이는 촛물을 심지로 빨아들이며 타오르는 불꽃을 나는 보았다. 공방 난로의 격렬하던 불꽃과 비교할 수 없이 작고 고요한 것이었다. 너울대는 불꽃 안쪽에서 파르스름한 심부가 흔들리고 있었다. 맥이 뛰는 씨앗 같았다. 가물거리는 주황빛 가장자리까지 고동이 번지는 것 같았다."

-같은 책, 202쪽



  한강의 소설에서 생명은 약하고 아름다워. 약해서 아름답다는 말이 맞을까. 눈송이처럼 촛불처럼. 사는 존재들은 곧 녹아내릴 듯 곧 꺼질 듯 모두 간신히 살아내고 있어. 하지만 인간이 얼마나 약한지를 우리는 자주 잊어버리곤 하지.



"유리문 밖으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육체가 깨어질 듯 연약해 보였다.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그렇게 죽음이 나를 비껴갔다. 충돌할 줄 알았던 소행성이 미세한 각도의 오차로 지구를 비껴 날아가듯이. 반성도, 주저도 없는 맹렬한 속력으로."

-같은 책, 15쪽



  내가 오늘 살아있다는 건 오늘도 죽음이 무사히 나를 비껴갔다는 뜻이야. 하지만 그 사실에 안도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지. 나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같은 감사는 참 쉽고 참 후지잖아. 소설을 읽는다는 건 안도를 애도로 바꾸는 일이야. 누군가의 불행에 기대어 나의 평온을 감사하는 안이함에 금을 내면서.


  이 소설은 약하고 아름다운 생명이, 아주 많은 생명들이 함부로 짓이겨졌던 제주의 4월을 복기해. 3만 명의 사람들이 어떤 말을 들으며 끌려갔는지. 어떤 고문을 받았는지. 죽기 직전 가족들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뼈들이 무더기로 엉겨 어떻게 묻혀있었는지. 유가족들은 무엇을 후회하는지. 혈육의 유해를 찾지 못한 그들이 어떻게 해야 했는지 까지.



"천 명도 넘는 사람들로 선착장이 가득 찼는데, 총을 멘 경찰 수백 명이 그 자리에서 우리를 줄 세웠습니다. (...) 호송차 여러 대에 올라타기 시작하는데 줄 뒤쪽에서 젊은 여자가 아니메, 아니메, 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굶주려 그랬는지. 무슨 병을 앓았는지 배에서 숨이 끊어진 젖먹이를 젖은 부두에 놓고 가라고 경찰이 명령한 겁니다. 그렇게 못한다고 여자가 몸부림을 치는데, 경찰 둘이 강보째 앗아 바닥에 내려놓고 여자를 앞으로 끌고 가 호송차에 실었어요.

이상한 일입니다. 내가 그 말 못 할 고문 당한 것보다 ...... 억울한 징역 산 것 보다 그 여자 목소리가 가끔 생각납니다. 그때 줄 맞춰 걷던 천 명 넘는 사람들이 모두 그 강보를 돌아보던 것도."

-같은 책, 267쪽


  "오십 년 동안 입구를 밀봉했던 콘크리트가 부서지자, 갱도를 타고 내려갈 공간도 없이 어마어마한 유해들이 쏟아져나왔다. 그 입구가 처형 장소였던 것이다. 거기 세워진 사람들이 총을 맞고 갱도에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기자는 썼다. 아래쪽의 제2수평갱도를 시신들이 채운 뒤 그 위로 떨어진 시신들이 제1수평갱도까지 차올라 흩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지상과 맞닿은 수직갱도 입구까지 시신으로 가득 찼을 때 군인들이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썼다."

-같은 책, 284쪽



  소설의 초반부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지난날이 '껍데기에서 몸을 꺼내 칼날 위를 전진하는 달팽이' 같았다고 해. 찔리고 베이며, '피인지 진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끝없이 새어 나오는 몸' 같았다고. 내게는 그 문장이 이 소설의 서문처럼 읽혔어. 칼날 위를 맨몸과 온몸으로 전진하듯 이 소설을 써냈구나. 작가는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써야만 하며 독자는 고통스럽게 읽어야 할까. 왜일까.


  사람들은 문학을 읽으면 감수성이라는 게 자란다고 하잖아. 감수성이라는 건, 말하자면 슬픔을 멀리까지 보낼 수 있는 힘이야. 나의 면접 탈락, 내 가족의 입원, 내 친구의 실연을 넘어서 먼 동네의 산불, 그보다 더 먼 나라의 전쟁, 어쩌면 더 멀리 나아가 종이라는 경계 너머 수온이 높아져 폐사한 물고기들과 생매장되는 소, 도시개발을 위해 타오르는 나무들까지. 그런 나 아닌 존재의 괴로움에 함께 울어지는 힘.


  그리고 이렇게 까지는 알고 싶지 않았는데, 싶은 누군가의 민낯 같은 슬픔을 결국 괴로워하며 마주 보게 하는 것은 작가들의 힘이고. 그들이 쓴 고통의 디테일을 읽다 보면 내가 당해보지 않은 슬픔에 나를 데려가 보는 상상력이 생기지. 나는 이 책의 초반부에는 사람의 생명이 연하고 귀해서 울었고, 후반부의 제주도 방언으로 몰아치는 증언에는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이럴 수 있는지, 어떻게 나는 이런 걸 외면하고도 잘 살았는지 부끄러워서 울었어.


  이런 소설은 결국 우리의 기분을 망칠 거야. 보람을 주지 않을 거야. 오늘의 업무나 내일의 집안일을 더 잘할 수 있게 하는 실용적인 깨달음을 주지도 않을 거야. 다만 남의 슬픔을 더듬으며 나의 슬픔을 더 멀리 보내 보겠지. 우리 계속 소설을 읽자. 무뎌지지 않게 새 슬픔을 꺼내자. 그리고 부끄러워하며 새로워지자.


  탄산음료식 전개와 개운한 엔딩은 대개 흡족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현실을 향해 문을 꽉 닫지만, 어떤 텍스트는 닫히지 않은 틈을 남기곤 해. 그 틈에 다가가는 기분으로 책을 펼치면 우리는 알게 될 거야. 결국 우리는 웃는 얼굴이 아니라 우는 얼굴을 껴안게 된다는 걸.

    

(202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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