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이름 붙이기』, 존 케닉 지음, 황유원 옮김, 윌북, 2024
몇 주 전에 알게 된 놀라운 사실 하나. 내가 한없이한없이한없이한없..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 만 27세 인생에서 가족 친구 직장 포함 칭찬맨들에게만 둘러싸여 자랐고(그럴 리 없음. 비난맨들은 기억구슬 날려보내기 장치로 지워버렸을 가능성 99%. 늘 열일하는 내 머릿속 기쁨이 사랑해.), 칭찬감옥 무기징역수로만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2024년 7월 1일 오후 4시 30분. 메일함을 열고서야 알아버리고 만 것이다.
메일함에는 며칠 전 피드백을 요청드렸던 입사지원서에 대한 답장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뵈었을 때,
주변을 밝게 하는 에너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라는 칭찬에 미소짓던 것도 잠시. 그 아래부터 나의 자기소개서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60줄이 넘어가는 내용을 대략 요약하면, 1번)당신의 지원서에는 해당 회사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네요. 2번)당신은 ㅁㅁㅁ 직무에 지원했지만 ㅇㅇㅇ 직무가 더 맞는 것 같군요. 굳이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잘 생각해보세요. 1번은 그렇다 쳐도... 2번은 적잖이 충격이었다. 그 분야에서 권위 있는 대선생님의 피드백이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나는 박식한 사람의 권위에 매우 약하다.
메일을 받기 며칠 전 입사지원서 특강을 들었을 때, 선생님께서는 '입사지원서 200개 중 하나 정도가 수정이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고, 대개 아주 미흡하다'라고 하셨다. 나는 내가 당연히 전자인줄 알았다 ^^. 쓰면서도 웃기네. 니가 뭔데? 니가 뭔데에에에. 내 의식의 흐름 : 자소서를 고쳐야 한다 = 너 자소서 못 썼다 = 너도 다른 무수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모자른 지원자 1일뿐이란다. 최근 천천히 읽고 있는『슬픔에 이름 붙이기』(존 케닉 지음, 황유원 옮김, 윌북, 2024)에서 모호한 감정을 표현한 여러 신조어를 나열하는데 그 중 내 감정과 가장 유사한 단어를 찾았다.
케이노포비아
평범한 삶을 살고 말았다는 두려움
평범한 삶을 살고 말았다는 두려움! 정확히 말하자면 내 감정은 스스로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두려움에 가깝지만. '평범'과 '두려움'이 붙을 수 있구나, 붙어도 되는구나, 라는 놀라운 발견22. (놀라운 발견 1은 내가 범재라는 사실)
그날 저녁 남편에게 내가 평범하단 게 두렵다고 했지만 그는 공감하지 못했다. (남편에 대한 TMI 1)남편의 오랜 꿈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평범만큼 어렵고 대단한 게 없다") 그리고 희선이는 절대 평범하지 않아, 희선이는 특별해, 희선이는 꼭 성공할거야, 라고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남편은 어느 분야에서든 내 재능이 꽃피어 제2의 장항준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 이 발화에는 우울한 배우자를 북돋우는 목적과 함께 자신의 열망을 꺼뜨리지 않으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여튼 그 말에 조금 힘이 나서, 정신을 차리고 메일에 답장을 보냈다. "제게 더 필요했던 건 막연한 칭찬보다 전문성을 가진 선배님의 피드백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제가 더 잘 할 수 있는 일은 ㅁㅁㅁ 보다 ㅇㅇㅇ 이겠지만 대표님이 진행하시는 강의를 수료하며 이 순서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역량이 충분히 보여질 때까지 입사지원서를 100번 고쳐야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중략)" 평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실밖에 답이 없겠지. 인정하고 나니까 더 열심히 하고픈 맘이 솟아나기도 하였다.
돌아보면 10대부터 나는 무언가를 하다가 그만두는 중도포기로 나의 특별함을 지키려고 했다. 베이스기타로 예술고등학교에 지원하려다 입시곡이 생각보다 어려워 포기했고, 작곡으로 음악대학을 가려다 수시 1차에 모조리 떨어지고 역시 음악은 취미였을 때 재밌다며 수능이 끝나고 나서야 포기했던 순간들. 마치 '서울대나 지원해볼까? 떨어져도 서울대 지원했다가 떨어졌다고 하면 간지나지 않냐'는 농담처럼. 본연의 재능으로 어떻게든 비벼서 될 일이 아니면 쿨하게 놓고 큰 노력이 필요치 않은 일들을 찾아왔다. 그래서 최근까지도 책이 문학이 출판계가 나를 차기 전에 내가 먼저 차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고. 특출나지 않을 거면 시작조차 하기 싫으니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독보적이었으면 좋겠으니까. 조금만 성실하고 많이 잘해지고 싶으니까!!!!!!!! 이 세상에서 내가 강백호가, 히나타 쇼요가, 그런 어딘가의 천부적 재능이 꿈틀거리는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결론적으로 그날 이후로 나는 평범을 인정하고 고꾸라지기로, 아예 드러누워 버리기로, 드러누웠다가 몸을 뒤집어 낑낑 기어보기로 했다. 새 결심을 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잖아. 너무 많이 돌아왔나 망설이지 말고 더 일찍 시작했어야 했나 후회하다가도, 성질 급하고 충동적인 내가 얼마나 고민해서 내린 결정인지 되짚어보면 이게 기어서 가고 싶을 정도로 건너고 싶은 길이구나 싶다. 이젠 마냥 세상이 꽃밭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내 인생에 언젠가 거쳐야 했던 그때가 바로 지금 찾아왔구나 하는 묘한 안도감도 있다.
질슈메르츠
마침내 평생에 그리던 꿈을 추구하게 되었을 때, 유치원 시절부터 품기 시작해서 최대한 오랫동안 겨온 희망과 망상의 유리 온실에서 더는 보호받지 못한 채 탁 트인 대초원에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드러내 놓고 시험해야 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
오늘 가장 가고 싶었던 회사에 입사지원서를 넣었다. 100번까지는 못 고쳤지만 공고가 올라온 뒤 2주 동안 퇴근하고 밥먹고 노트북 앞에 앉아 경력기술서...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를 밤새 50번은 고쳤다. 자신만만하게 지인들에게 자기소개서며 면접이며 내가 다 봐주겠다며 합격률을 자랑하던 지난날의 나... 자신의 자소서 앞에서는 얼마나 메타인지가 결여된 바보가 되는지 느끼며. 아시나요. 메타인지가 가장 떨어지는 새벽에ㅡ그때밖에 시간이 안 나니까요ㅠㅠㅡ자기소개서를 6시간 내내 쓰다가도 메타인지가 회복되는 아침, 다시 확인하면 모조리 고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괴로움을.
최선을 다하면 실패해도 후회가 없다는 말. 최선을 다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잘 몰랐는데 그거 거짓말인 것 같다. 최선을 다했는데 실패하면 분하지 않을까요? 욕은 물론이고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비속어를 입에 담지 않는 저 같은 사람도 산 정상에 올라가 야-호- 대신 두 글자 쌍욕을 외치고 싶지 않을까요? 다들 그렇게 대인배라고? 나 빼고? 이렇게 열심히 해놓고 서류에서 떨어지면 너무너무너무 슬플 것 같은데요. 그래도 다음은 분명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긴다... 고 써본다. 그동안 못잡았던 약속을 잡고 밀린 책도 다시 읽고 그래야겠다.
"경지에 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답이 비슷하더라고요. 모두가 사실은 시간을갈아 넣어서, 엄청난 훈련 끝에 올라간 거라고요."
롱블랙 인터뷰, <디자이너 석윤이 : 서점 평대에서 MoMA까지, 색과 패턴에 이야기를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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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말
푼트 킥
마치 인생이라는 게임의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어 이제는 완전히 다른 토큰을 들고 전진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듯, 지금껏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어준 모든 전략이 더는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는 이제 더 나은 존재가 될 때가 왔다고ㅡ귀엽거나 친절하거나 올바르거나 강인한 것으로는 이제 충분치 않다고ㅡ느낄 때의 조용한 가슴떨림.
귀엽거나 친절하거나...? 이거 완전 나잖아...! 인생의 많은 위기를 귀여움으로 무마해버렸던 지난날은 얼마나 수월했던가... 아마 이 힘으로 3년 6개월의 직장생활이 가능했을 것이다. 나의 귀여움과 친절함에 속아버렸던 이들은 알까? 내가 나의 무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혹은 그들이 나에게 기꺼이 속아준 것일까? 지금 이 글을 읽고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애송이 녀석. 이제야 알아차렸군, 후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