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에 담은 개똥철학
주말이 3일이나 남은 설움을 달래는 카페인의 힘
화요일이다. 믿을 수 없는 월요일의 도래를 뒤로 하고, 본격적으로 일개미의 삶으로 복귀해야만 하는 화요일이 왔다. 지루하고, 또 지루하다. 이럴 땐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커피를 무척 좋아한다.
따뜻한 커피는 생리통이 심해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을 때, 몹시 추운 겨울날의 거리를 장갑 없이 걸어야 할 때 필요하다. 반면 차가운 커피는 무더운 여름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추운 겨울날에도 종종 필요한데, 실내에서 전기난로를 2단으로 켜두고 몸을 따뜻하게 덥힌 후에 마시는 차가운 커피 한 모금은, 나를 구원한다.
커피 중에서도 카페라테를 즐겨 마신다. 따뜻한 라테도 좋고, 얼음을 가득 넣은 라테도 좋다. (대신 차갑거나, 따뜻하거나 반드시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 허용된다.)
커피에 대한 나의 애착은 마약중독자의 그것과도 비슷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식도를 타고 넘어간 카페인은 위장과 혈관들을 타고 흐르며 온 몸 구석구석에 퍼져나간다. 이윽고 기분이 완만히 고조되면서, 줄곧 회색빛을 띠던 구질구질한 일상의 화면들이 갑자기 UHD 고화질로 탈바꿈해 다채로운 색상을 뽐내며 펼쳐진다. 카페인을 직격타로 때려맞은 두뇌는 잠시 황홀경에 빠진다.
이 얼마나 숭고한 순간인가. 카페인이 두뇌를 지배하는 찰나의 5분 동안 나는, 끝없이 쌓이는 업무, 묵혀놓은 집안일 등등 꼭 해야 하지만 너무나도 귀찮은 모든 일들 앞에서도, ‘허허,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하며 세상사 달관한 주지스님의 모습이 된다. 이때만큼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남편의 게임에 열중한 뒷모습도 그럭저럭 봐줄만한 풍경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카페인에 취약한지라, 하루에 딱 한 잔의 커피만 마실 수 있다. 약 340ML 정도의 커피만이 내가 품을 수 있는 최대한인데, 그마저도 오후 3시 이후에 마시는 커피는 절대 금물이다.
간혹 커피를 1잔 이상 마시거나, 오후 늦게 마시게 되는 날에는 심장이 벌렁벌렁 요동쳐 가슴을 부여잡게 되고, 새하얀 변기와 나누는 몸의 대화가 길어지며, 새벽 4시까지 뻘건 눈을 뜬 채 ‘인간은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와 같은 명제에 대해 고뇌하는 개똥철학의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얼마동안은 이렇게 좋아하는 커피를 마음껏 먹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우울하게 했다. 태생적으로 혼자를 즐기고 음주가무에도 별 뜻이 없는 내가 유일하게 즐기는 것이 독서와 커피인데 말이다. 밤 8시가 넘은 시간에 아메리카노 한 잔을 다 마시고도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잠드는 남편의 모습에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뜬금없지만 언젠가 동물이 주인공인 프로그램에서 본 내용이 기억난다. 키우는 강아지가 식탐이 너무 많아 고민인 견주에게, 전문가는 강아지에게 간식 한 통을 한꺼번에 줘 보라고 말했다.
견주는 전문가의 말에 따라 육포 한통을 강아지 앞에 쏟아 부었다. 그러자 강아지는 몹시 당황하더니, 한 두 개의 육포만 먹는 듯 하다가 나머지 육포를 모두 바닥에 남겨둔 채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문득 나는 깨달았다. 강아지는 처음 한두 개의 육포는 맛있게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양의 간식이 자신 앞에 널브러진 상황에서, 육포는 그 강아지에게 더 이상의 기쁨이 될 수 없었을 테다. 시장경제에서 포화된 재화들은 곧 희소성이 떨어져 가치를 잃게 되는 것처럼.
나 또한 그렇다.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커피를 마음껏 마셔댈 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커피를 좋아할 수 있었을까. 커피를 마음껏 마시지 못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내가 커피를 사랑하고 즐길 수 있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커피를 마셨다. 아이스 카페라테 한 잔으로 카페인 뽕을 거나하게 맞고 잠시 흐뭇해진 나는, 흡사 마더 테레사와 같은 너그러움으로 남편에게 2시간의 게임을 허락했다. 짧게나마 일상의 고단한 순간순간들을 반짝 위로해주고 유유히 사라지는 카페인의 존재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존재의 유한함에 무한히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