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쥐 근일이의 삶

아빠를 쓰다

by 박유진


편의점도 카페도 하나 없는 고즈넉한 시골에서 자란 아빠는 영락없는 시골쥐였다. 전후 세대에 나고 자란 수많은 이들처럼 아빠 역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넉넉지 않게 자랐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라 아빠는 밥이 없으면 고구마나 감자를 캐먹고, 반찬이 없으면 수박 껍질을 잘라 무쳐 먹었다. 음료수나 과자 같은 것들을 구하기 힘들었던 까마득한 시골에서 아빠는 자본주의의 맛, MSG와 화학첨가물이 선사하는 궁극의 맛을 모르고 자랐다.


무릎이 까지면 된장을 바르고, 열이 나면 웃옷을 벗고 물수건을 이마에 올리는 게 다였고, 약을 잘 먹지 않았다고 한다.(먹지 않았던 건지, 못했던 건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아빠는 요즈음 시중에 나오는 달고 맛있는 물약들을 좋아한다. 가끔 소화기관이 약한 엄마가 가스활명수를 먹고 있으면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그 모습을 눈치챈 엄마가 한 모금을 남겨주면 그제야 남은 것을 흡족해하며 마신다. 아빠의 어린 시절을 엿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모습이다.


아빠는 났을 때부터 귀가 좀 불편했는데, 할아버지는 그런 아빠에게 귀 수술을 할 건지 아니면 그 돈으로 학교를 갈 건지 선택하라고 했다. 백날 털어봐야 수술비는 절대 마련될 리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던 영특한 아빠는 학교 가는 것을 택했고, 열심히 공부해서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만난 엄마와 한 달 만에 초고속 결혼을 했다.


아빠는 내가 세상에서 만난 그 누구보다 빠르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아빠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빠는 마치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같았다. 목표하는 어딘가에 방점을 찍고 오직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만 몰두하는 집념의 사나이.


아빠는 내가 살아온 세월보다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냈으면서도, 늘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 했다. 아빠는 부동산을 공부해서 소소하게 투자를 했고, 법원 경매에 뛰어들어 아빠의 낡은 아반떼를 싼 값에 중고 SUV로 바꾸었다. 쉬는 날이면 강으로 산으로 산악자전거를 타러 다녔고, 음악학원에서 드럼을 배워서는 급기야 작은 연주회에도 참석했다.


아빠는 시간의 공백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빠에게는 집념과 열정과 시간을 쏟아부을 대상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아빠는 1987년 첫 딸을 얻었고, 1990년 둘째 딸, 1992년 막내아들까지 얻으면서 매우 바빠졌다. 많은 시간과 관심을 들여 돌봐야 할 돼지 삼 남매가 결성되었고, 내내 시골쥐로 살아왔던 아빠의 역사도 터닝포인트를 맞이했다. 그때부터 우리 셋은 아빠의 삶의 이유이자 존재의 이유가 되었다.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는 아빠는 역시 우리 삼 남매에게도 최선을 다했다. 최선이라 여겼던 아빠의 방식들로. 그나마 날 때부터 똑똑하고 공부를 곧잘 했던 언니는 아빠의 걱정을 손쉽게 벗어났다. 언니보다 열심히 공부하지만 성적은 한참 못 미쳤던 나와 "책 좀 봐라, 책 좀!" 하는 아빠의 말에 '사랑해요 태극전사' 책에서 이천수 선수가 나오는 페이지를 읽는 척하던 동생이 주로 아빠의 관리 대상이 되었다.


모든 배움이 느렸고 굼떴던 내게 아빠는 산수를 가르쳤다. 덧셈 뺄셈을 가르쳤고 구구단을 외우게 했다. 제대로 외웠는지 숙제 검사를 받을 때마다 나는 손바닥에 작게 숫자들을 적었고 힐끔힐끔 눈으로 컨닝을 해가며 아빠의 테스트를 겨우 통과했다. 물론 아빠는 작은 딸내미의 깜찍한 부정을 눈치채고도 모른 척했겠지만.


이후 질풍노도의 시기를 정면으로 마주한 둘째 딸이 걸핏하면 소리 없이 우는 아이가 되었을 때, 왜 숙제를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말에도 묵묵부답인 채 닭똥 같은 눈물만 흘렸을 때도, 아빠는 다그치지 않고 작은 딸의 눈물과 설움을 묵묵히 보듬었다. 그렇게 아빠의 길고 긴 인내와 함께 잠시 휘몰아쳤던 사춘기도 무사히 지나갔다.

철야 근무를 하고 돌아오는 아침이면 아빠는 늘 외투에 바깥 냄새를 묻힌 채 귀가했다. 그리고는 매일 점퍼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내어 놓았다. 가나 초콜릿, 빙빙바나 더위사냥 같은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을. 가족 수 대로 꼭 네 개씩 주머니 속에 품고 와서 우리 삼 남매 앞에 내려놓았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제각각의 모양들로 산발을 한 내복 차림의 돼지 삼 남매는 아빠가 내놓은 과자며 아이스크림들을 보고 깨춤을 추었다.


아빠의 삶 한 귀퉁이였던 우리 삼 남매는, 이제 다시 각자에게 남겨진 몫의 삶으로 되돌아갔다. 젊은 날의 아빠가 그러했듯, 우리 삼 남매는 이제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키우고, 먹고 살 날들을 걱정하며 산다.


그리고 아빠는 그곳으로 돌아갔다. 경남 창녕군 대합면 퇴산리. 아빠에게도 아빠가 있었던 그 시절 그곳으로. 아빠는 이제 다 커버린 자식들 대신 꿀벌들을 키운다. 높은 건물 하나 없는 넓고 평평한 들판에 작은 컨테이너 하나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꿀벌들을 정성스럽게 먹이고 돌본다.


얼마 전, 아빠가 첫 수확이라며 꿀단지 하나를 보내왔다. 나무 숟가락을 꺼내 한 스푼 가득 담아 맛을 보았다. 꿀은 아주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사랑의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