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 Mar 05. 2017

미의 궁전: 반데스레이 Banteay Srei

캄보디아 사원 둘러보기. 네번째




투명한 베일을 떠올리게 하는 여신이 있다.
락슈미.
바다 아래서 깊은 잠을 자다 바다 휘젓기 전쟁의 소란 속에 깨어난 여신이다





바다 휘젓기 전쟁
시엠렙에서 사원을 돌아보다 보면 이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압사라 공연으로 유명한 스마일 오브 앙코르 쇼에서도이 이야기는 메인 스토리 중 하나이다
암리타라는 약이 있었다이 약영생을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약이다.
그렇기에 신들도 악마들도 모두 이 약을 탐냈다
하지만 아무리 타는 바다 아래 깊숙이 가라앉아 있어 신도 악마도 꺼낼 수가 없었더란다.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지라고 하지 않던가. 신들과 악마들은 힘을 모아 바다를 젓기로 한다. 





이 신들항아리 속의 우유를 젓듯이무언가를 바다 한가운데 꽂아 넣고 빙글빙글 돌리면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바다를 저을 만큼 커다란 국자가 필요할 터였다하지만 다들 마음이 급했는지 만들 생각은 아무도 안 했다일단 커다란 산을 하나 뽑아왔다그 산에 살고 있는 동물들은 자다 일어나니 바다 위에 떠있게 된 셈이다.
비슈누 신은 거북이로 변해 뽑아온 산을 받쳤다매끈하고 둥근 거북이 등 위에서 산이 빙글빙글 돌 수 있게 말이다이 산을 밧줄 같은 것으로 휘감아 양쪽에서 당기면산이 빙글빙글 돌아서 바다를 휘저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국자도 안 만든 신들이 그렇게 거대한 밧줄을 꼬고 있었을 리가 없다신들이 주저 없이 산에 휘감은 것은 용이었다
그것도 불을 내뿜는 용바슈키.
용을 휘감은 신들은 양쪽에서 열심히 용을 잡아당겼다.





무사히 끝날 리가 없는 일이었다.
밧줄 대용으로 쓰인 것도 억울할 노릇인데느닷없는 능지처참 형을 당하게 되었으니 용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용은 몸부림을 치며 불을 뿜어냈다산불이 나고바다에까지 불이 옮겨 붙고 난리가 났다
그제야 우리가 너무했나 싶은 인드라 신이 비를 내려일단 불을 껐다
암리타가 그쯤 해서 떠올랐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불바다 위에서의 줄다리기가 계속될 뻔했다.





영생의 묘약 암리타가 떠오르기 전 바다 거품이 일어난다
바다 거품과 함께 열네 개의 보물이 떠오르는데그중에는 태양도 있고 달도 있었다온갖 여신들도 태어난다
락슈미는 그중에서도 태양과 달 다음으로 떠오른 여신이었다
이 락슈미의 탄생 덕분에, 세계는 용이 내뿜은 불꽃과 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바가 락슈미에게 구애하다 차이자, 그 독을 모두 마시고 자살해 버렸기 때문이다. 
역시 시바. 능청스러움과 엉뚱함에서는 최고이지 싶다. 
당연히 시바는 다시 살아났고, 락슈미는 비슈누의 아내가 되기를 택한다. 
락슈미는 바닷속에서 잠들어 있었으니,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이 비슈누는 아니었을까 싶다. 
거북이로 변해 바다 아래 가라앉아, 애써 산을 버티고 있었을 비슈누 말이다.





바다의 거품 속에서 태어났기에 그리스로마 신화의 비너스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락슈미.
이 여신은 힌두의 여신들 중에서도 단연 사랑받는 여신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이 여신의 이야기는 어쨌든 사랑스럽고 기품 넘친다
비슈누가 난쟁이 바마 나로 전생했을 때물 위에서 연꽃을 타고 비슈누의 생을 함께하는 락슈미의 모습은 상상하노라면 그야말로 귀부인이다마차 안에서 끈기 있게, 운명을 받아들이나 자신의 주체성은 포기하지 않는 고결함이 엿보인다





락슈미의 역할은 사실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
락슈미는 힌두교 초기에는 풍요와 행운의 여신이었다그러나 뒤로 갈수록힌두교를 믿는 사회가 경직화됨에 따라 비슈누의 정숙한 아내현숙함의 상징으로 그 역할이 축소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종교가 지배 이념과 뒤섞이는 순간신들의 위치도 조정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락슈미는 여전히 풍요의 여신이었다연꽃 위의 락슈미코끼리의 축복을 받고 있는 락슈미의 조각은 시엠렙을 거니는 동안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이 집안의 안정과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이리라.





반데스레이 사원은이 락슈미 사원의 정원 같은 곳이었다높거나 웅장하다기보다는우아하며 섬세했다
그래서일까사원의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귀부인의 정원에 초대받은 기분이 되었다.
반데스레이에 간다면기둥의 조각 하나하나를 지긋이 바라보기를 권한다
앙드레 말로가 동양의 비너스라고 칭송했다는 여신상도 그렇지만여신의 주변을 둘러싼 장식들의 섬세함은 더할 나위가 없이 훌륭했다벽에 새겨진 무늬는 부드러운 레이스 천에 새겨진 자수와도 같았다.
좀 더 이곳에 머물렀으면
하지만 일행들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가장 뒤에서 늑장을 부려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답 없는 인사와 함께 사원을 떠났다. (*)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미소: 바이욘 사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