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윤이 Oct 08. 2024

당신의 생존을 지지합니다.

episode 17.

   



“암생존자통합지지실?”     



한창 방사선치료를 열심히 다니던 무렵, 교수님과 면담을 앞두고 긴 대기가 있는 날이었다. 심심해서 건물 1층 한 바퀴를 쓱 둘러보고 있는데 낯선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암생존자통합지지실.     


저기는 뭘 하는 곳일까? 호기심이 불쑥 솟았지만 이내 외면해 버리고 말았다. ‘암 생존자’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무거움이 안 그래도 쪼그라든 마음을 더 짓누르고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새삼 내가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걸 방증하는 느낌이라 그랬을까.   

더욱이 치료를 마치고는 ‘암’이라는 건 마치 내 인생에 없었던 일처럼 살려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암생존자통합지지실에 대한 궁금증도 역시 연소된 불꽃처럼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렇게 2년이 흘렀고 이제는 ‘암’을 내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됐을 무렵, (이전에 언급했던) 암센터 동료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암생존자통합지지실’에 대한 이야기를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됐다.

참 신기하게도 2년 전에 ‘암생존자통합지지실’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암 생존자’라는 단어에 매몰되었다면,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지지’라는 단어에 몰입이 되었다. 그만큼 내 병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천천히 잘 소화했다는 것이 느껴져 스스로가 대견했다.

이왕 이렇게 잘 성장한 김에 한 뼘 더 나아가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고 쇠뿔도 단 김에 빼랬다고 바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이라도 방문하면 바로 상담을 해주겠다 하셔서 진짜 그 길로 센터를 찾아갔다. 오랜만에 감춰두었던 추진력을 발동했던 날.       


암생존자통합지지실에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들은 모두 암생존자 통합지지실 등록자만 참여가 가능하기 때문에 미등록자인 경우, 먼저 방문 등록을 해야만 한다. 담당 사회복지사님과 만나 간단한 설문과 대화를 통해 등록을 완료했고 이곳이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그래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지, 2년 전의 궁금증을 완벽하게 해결하고 돌아왔다.     


암생존자통합지지서비스에서 말하는 암생존자란 암 진단을 받고 완치 목적의 주요 치료(수술, 항암, 화학요법, 방사선치료 등)를 마친 암 환자를 말한다. 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는 이런 암 환자와 가족의 건강증진과 사회복귀를 통한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 전문가들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필요한 경우 암생존자 클리닉 및 지역사회 자원과 연계하는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 양질의 서비스는 모두 무료!


이렇게 잘 마련되어 있는 국가사업을 2년 동안 외면했다는 게 스스로 어이없을 정도로 좋은 프로그램이 많았다. 하지만 한 가지 안타까웠던 것은 치료를 마친 암 환자만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현재 치료를 받고 있는 암 환자더라도 컨디션을 비롯한 여러 여건이 맞는다면 참여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아직 치료를 받고 있는 동료를 떠올리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암 생존자 통합 지지 프로그램은 크게 4개의 카테고리로 나뉜다. 신체, 심리, 생활, 심층 상담. 보통 암 생존자는 암 치료 후 신체, 심리적 후유증 및 합병증을 경험하며 일상생활, 사회복귀 등에서 다양한 어려움을 갖고 있다는 통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신체적으로 스트레칭, 전신 근력 운동, 기능개선 운동, 바른 자세로 걷기 등을 통해 신체기능과 체력을 향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심리적으로는 디스트레스를 이해하고 올바른 수면 습관을 배우며 불안을 다스리는 방법을 익혀서 마음을 건강하게 관리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고 있다. 생활적으로는 건강하게 식생활을 관리하는 방법과 일상생활 및 사회로 복귀하기 전에 필요한 정보들을 얻는다. 그리고 필요시에는 심층 상담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참 잘 꾸려진 복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국립암센터 암생존자통합지지실의 9월 일정으로는 직업복귀준비하기, 근력강화운동, 수면위생교육, 이환훈련, 상지기능개선운동, 건강관리, 피로관리, 영양식생활, 바른 걷기, 재발두려움, 토닥토닥 내 마음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나는 처음이라 우선은 토닥토닥 내 마음이라는 상담 프로그램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상담 프로그램은 수요가 많아서인지 대기가 길다고 했는데 중간에 빈자리에 생겨서 생각보다 빨리 상담을 받게 됐다.      



미리 안내해 주신 임상심리실로 향하는 마음은 설렘 반 긴장 반이었다. 과연 어떤 이야기들을 하게 될까.

처음 마주한 상담 선생님은 내 또래의 여자분이라 한결 마음이 편했다. 우선 현재 심리 상태에 대한 간단한 질문지를 작성하고 선생님과의 상담을 시작했다. 언제 어떻게 암 진단을 받았는지에 이야기를 이어 나가다

“암 진단을 처음 받았을 때 어떤 마음이 드셨어요?”

라는 질문에서 턱 하고 막혀버렸다.

이미 그 마음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묘사해 글로 써 놓기까지 했는데 막상 입으로 이야기하려니 뭐라고 해야 할까. 자꾸만 입에서 맴돌 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음, 음, 하면서 한참 뜸을 들이다가 “잘 믿기지가 않았어요. 그저 앞으로 닥친 일을 잘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그건 거짓말도 아니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여러 마음 중 하나였을 뿐인데 나는 굳이 저 마음을 택해서 답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 이어진 많은 질문에도 내 대답은 굉장히 객관적이고 견고했다. 일부로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답하고 있었다. 또 이런 질문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윤이 님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해결책을 주길 바라세요? 아니면 그냥 잘 들어주시길 바라세요?”

이 역시 너무 간단한 질문이었는데 쉬이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멋쩍게 웃으며 “잘 모르겠어요.”하고 답했다. 선생님은 “윤이 님이 아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경험이 많지 않아서 그런 것 같네요.”하셨는데 내가 정말 그랬었나 의아하면서도 어쩐지 들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상담 말미에 선생님은 물으셨다.     



“오늘 상담 어떠셨어요?”  


“평소 남에게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는 편인데, 상담이라는 명분 아래 제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다행이에요. 윤이 님은 제가 만난 내담자들과 비교해봤을 때 말을 많이 안 하시는 편에 속하세요. 다른 분들은 울기도 하시고 감정을 많이 드러내시는데 윤이 님은 말씀하신 대로 본인의 이야기를 한 경험이 많이 없으셔서 그런지 시원하게 쏟아내지는 못하는 것 같으세요. 그래도 암 진단 이후부터 지금까지 감정을 긍정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제가 따로 도움을 드리지 않아도 될 만큼 잘하고 계신 것 같아서 너무너무 칭찬드립니다.”



그렇게 무한한 칭찬을 끝으로 상담을 마쳤다. 이 프로그램은 일회성 상담이었고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선생님을 만나 10회기 상담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원하면 연결을 해주신다고 하셔서 얼른 대기 신청을 하고 왔다. 10회기 상담을 마치고 난 후 나의 어떤 모습이 변화되었으면 좋겠냐고 물으시길래 웃으면서 답했다.



“제 이야기를 솔직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다음 주에는 “재발 두려움”이라는 주제로 줌 수업이 있어서 신청해서 들었다. 줌 수업이라 수동적으로 듣기만 할 작정이었는데 선생님이 계속 질문을 하셔서 의도하지 않게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강의를 듣게 되었다. 선생님 그리고 다른 참가자 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나는 스스로 두려워하는 부분을 정확히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재발이 될까 봐 두렵다. 하지만 그건 재발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단 재발이 되어서 안 좋은 상황이 되었을 때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을까 봐, 그러니까 최악의 경우 아이의 곁에 있어주지 못할까 봐,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아이가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게 될까 봐 두렵다.‘


하지만 수업을 통해서 이런 두려움은 나만 갖는 것이 아니고 매우 보편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재발 두려움을 더 많이 느끼는 경우로는,

나이가 어릴수록, 어린 자녀가 있는 경우, 치료 부작용과 같은 신체적 증상이 있는 경우, 암 진단 전에 트라우마 경험이나 상실 경험, 여성, 병전의 정신과적 병력이 있는 경우를 꼽았다. 나의 경우 거의 모든 부분에 해당되었다. 이렇게 위험 요소가 많은 와중에도 이 정도로 건강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다니 스스로 무척이나 대견했다.



선생님은 수업을 마치며 두려움에 지혜를 더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1. 재발의 신호가 되는 증상 알아두기.

2.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표현하기.

3. 오감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

4. 걱정 시간(worry time) 갖기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암 경험자분들에게 작은 팁이 되길 바라며 적어둔다.           



암환자가 겪는 모든 정신적 고통을 디스트레스라고 한다. 암 생존자 스스로나 주변 사람들은 암 치료가 끝났으니 아프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나의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고 부담을 느낄 수 있다. 암의 재발에 대한 걱정과 공포,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과 막막함으로 불안감이 커지기도 한다. 하지만 물론 암 환자라고 해서 반드시 겪는 일은 아니다. 신체 증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 공격적 반응이나 회피와 같이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회복되기도 하지만, 오래 지속되어 악화되기도 하기 때문에 디스트레스는 반드시 관리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상담과 수업을 통해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암 경험자에게는 정서적인 지지가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것!      



암생존자통합지지실은 국립암센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권역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마다 다양한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전북, 강원, 경기, 경남, 광주전남, 제주, 충북까지 권역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 운영되고 있다고 하니 가까운 센터로 문의해서 이 혜택을 꼭 누려보셨으면 좋겠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잡지의 청탁 의뢰나 인터뷰 제안을 받기도 했다. ‘강윤이’라는 예명이 아닌 본명으로 나서야 하는 일이라 고민이 많았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외에는 모르는 일인데 이렇게 공식적으로 나가도 되는 걸까 싶기도 하고. 뭐 당연히 안 될 일은 아니지만 성격상 결정이 좀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에 암생존자통합지지실의 경험을 통해 나는 모든 의뢰와 제안에 응하기로 했다.

내가 겪은 일이 누군가에게로 닿아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지지의 마음이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 상담의 목표가 “내 이야기를 솔직하게 할 줄 아는 사람 되기”였으니까.          



그러니까 고백하건대,

저는요.

언제나 어디서나 언제까지나.

당신의 생존을 지지합니다.   

힘내요, 함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