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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Mar 26. 2022

장래희망은 동네 할머니

 취미는 사랑 / 가을방학



시간은 어김없이 정직하게 흘러 성큼 봄이 다가오고 있다.

꽤 따뜻해진 날씨를 만끽하며 하원한 아이의 손을 잡고 공원을 지나는데, 나란히 줄 서 있는 두 개의 벤치에 열 명 남짓의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쪼르륵 모여 앉아 계신다. 우리가 그 할머니들의 시야에 들어선 순간부터 피할 수 없는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주목 공포증이 있는 나는 웬만하면 그 길을 피하고 싶지만 그 길은 우리가 집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이미 아이의 발걸음이 나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고 나는 마지못해 그 앞으로 지나간다. 마치 무대에 서는 듯 한 느낌. 그러면 그때부터 가지각색의 목소리들이 3D 써라운드로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이고 예쁘다. 어머 얘 신발 좀 봐라 번쩍번쩍하네. 아이고 엄마도 애기 같이 어려."같은 모두 다 듣기 좋은 이야기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수줍어 겨우 고개를 들고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해야지'하면서 아이를 앞으로 밀고 내 몸은 슬쩍 뒤로 내뺀다. 그렇게 그 짧은 무대에서 내려와 등을 돌리면 그제야 나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온다.

볕을 쬐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시는 그 모습이 어쩐지 어린이집에서 소풍 나온 아이들 같아 보이기도 하고, 체육시간에 운동장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여고생 같기도 하고, 점심시간에 식사를 마친 후 짧은 산책을 즐기는 직장인들 같기도 하다. 어쩌면 그녀들이 누리지 못했을 지난 청춘들을 상상하며 나는 감히 우리 동네 할머니들이 귀엽다는 생각을 한다.


오래된 동네에 살아서일까. 할머니들과 동선이 많이 겹쳐서 일까. 언젠가부터 나는 동네 할머니들을 매일매일 마주친다. 특히 아이와 함께 있는 때면 종종 대화도 나누게 되는데, 어느 날은 공원 앉아 아이와 수다를 떨다가 보행기를 의지해 걷던 연로하신 할머니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인사했더니 아이가 먹던 과자를 보면서 '꼬마야 할머니도 하나만 줄래?' 하셨다. 그러자 아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과자를 한 움큼 쥐더니 할머니의 입으로(정확히는 마스크 위로) 가져갔고 할머니는 웃으시면서 '할미 장난이야. 꼬마가 다 먹어요.'하고 지나가셨다. 그대로 앉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나타나신 할머니가 불쑥 요구르트 하나를 내미신다. 작고 하얀 스푼도 함께.

'너무 귀여워서 그래요. 나는 손녀가 없거든. 아이고 참 귀엽다. 하시는 눈에서 꿀이 뚝뚝.' 원래 요구르트를 안 좋아하는 아이도 맛있게 하나 뚝딱 다 해치운다.

사랑의 힘. 존재만으로 사랑받는 이 시절의 작고 고운 기억들이 훗날 아이의 삶에 큰 자양분이 될 것 같아 든든한 순간들.


또 어느 날은,  옆으로 나란히 걷던 할머니가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으신다. 꾸벅 인사를 했더니 ‘제일 예쁠 때네요.’하시며 또 웃으신다.

‘우리 애가 이만할 때 지나가던 할머니들이 지금 색시가 제일 좋을 때야 예쁠 때야 하면 이해를 못 했는데. 이젠 내가 그 할머니가 다 됐네. 시간이 참 빨라요.’하신다.

아줌마가 된 지 한참이어도 여전히 넉살이 없는 나는 멋쩍게 웃기만 하다 길이 갈라지면서 헤어졌는데, 집으로 돌아와 쌀을 씻다가 그제야 문득 그 ‘제일 예쁠 때’라는 것이 나를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걸 알았다.


서른넷, 제일 예쁠 때. 제일 좋을 때.

그 아름다운 때를 보내고 있는 내가, 남편과 딸에게 줄 저녁밥을 짓고 생선을 굽고 있는 내가, 하고 싶은 게 많아 발을 동동 구르고 마음을 졸이는 내가 갑자기 예쁘고 좋아 보인다.

그러면서 갑자기 내가 가을방학의 '취미는 사랑'의 그녀, 그 노래의 여주인공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미소가 어울리는 그녀, 물을 준 화분처럼 웃어 보이는 그녀, 그냥 사람 표정이어도 너무 예뻐 보이는 그녀, 서투른 춤을 추는 불꽃같은 그녀, 취미가 사랑인 그녀!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살고 싶다. 좋아하는 노래 속에서 맘에 드는 대사와 장면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 흐르는 온기를 느끼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말이다.



시간이 많이 많이 흘러 건강하게 할머니가 되는 행운을 얻는다면, 나도 우리 동네 할머니들처럼 살고 싶다.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젊은이들에게 칭찬세례를 퍼붓고, 귀여운 아이에겐 내가 좋아하는 간식도 건네고, 조금 지친 표정으로 걸어가는 색시에겐 '지금이 제일 예쁠 때에요, 좋을 때에요.' 하고 다정한 말을 건넬 줄 아는 할머니로. 그러곤 덧붙여 ‘나의 지금도 꽤 괜찮아요.’하고 빙긋 웃을 수 있는 할머니가 된다면 소원이 없겠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나의 장래희망은

취미는 사랑인 '동네 할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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