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윤이 Mar 26. 2022

네 번째 이사

고마워서 만든 노래 / 옥상달빛


결혼한 지 8년이 채 안 됐는데 벌써 네 번째 이사.

이렇게 자주 이사를 다닌 건 나의 변덕과 이기심이 팔 할이었다. 그래서인지 살았던 그 집을, 그 동네를 떠나는 걸 슬프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저 내가 그 공간에서 잘 살아보려 애썼던 시간들이 떠올라 괜히 뭉클한 적은 있었어도 이별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던 것이다.

드디어 이삿날. 가까이서 친하게 지낸 동네 언니들을 만났다. 떠나기 전 잠깐 인사만 하려던 참이었는데 그중 한 언니가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아프면 참지 말고 병원에 꼭 가라고 말하면서 울었다. 나는 누군가 앞에서 우는 걸 못하는 사람이라 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옷을 따뜻하게 입으면 아플 일도 없을 텐데 나는 왜 맨날 옷을 얇게 입을까 그렇지?" 하며 이상한 헛소리를 해댔지만 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안아주면서 또 울었다. 슬펐다. 하지만 기여코 울지 않았고 그렇게 쓸데없이 꿋꿋하게 이사를 가는 차 안에 올라탔다.

마침 딸아이도 다니던 유치에 작별인사를 하러 갔다가 친구한테 받았다며 스케치북 한 장을 북- 찢어서 쓰고 그린 편지를 보여준다. 알록달록한 공주 그림 아래에는 삐뚤빼뚤한 글씨.


'우주야, 이사 가서 좋은 친구들 많이 사귀어. 보고 싶을 거야. 사랑해. 우리 집에 놀러 와. 우주 친구 서하가.'


그 스케치북 편지를 보는 순간 나는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심지어 딸아이는 나에게 왜 우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이미 다 안다는 듯이. 그제야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동안은 항상 '어딘가'를 떠나왔다면, 이번에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떠났다는 것을.

'아프면 참지 말고 병원에 가'라는 말이 사실은 '강윤아, 이사 가서 좋은 친구들 많이 사귀어. 보고 싶을 거야. 사랑해. 우리 집에 놀러 와.'랑 똑같은 말이라는 것을.


고향을 떠나 낯선 동네에서 가정을 이루고 게다가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니며 만나게 된 다양한 인연들을 나는 어쩌면 가볍게 생각했었다. 우리는 나이도, 배경도, 취향도 모두 다르지만 같은 동네에 산다는 하나의 공통점에 기댄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언제고 멀어지고 또다시는 못 보는 사이가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의 동네 언니, 동생, 친구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내주었다. 친정엄마 대신 반찬도 만들어 주고, 운전도 가르쳐주고, 내가 아플 때는 우주도 대신 돌봐주고, 어디 미용실이 잘하는지 어디 정육점 고기가 좋은지 어디 중국집이 맛있는 지도 일일이 일러주었다. 그래서일까,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옥상달빛의 '정말 고마워서 만든 노래'가 생각난다.

내가 그저 멋쩍어하지 못한 말, 그저 수줍어하지 못한 말이 바로 '고마워'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노래의 말미에는 멋 부리지 않은 미니멀한 사운드 안에서 옥상달빛의 정직하고 맑은 목소리로 '정말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서 만든 노래예요. 정말 고마워요 함께 해줘서.' 하는 단순한 가사가 반복된다. 정말 정말 진심을 이야기하고 싶을 때는 그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은 알맹이의 말이 나오기 마련이고, 또 그 말이야말로 상대방에게도 가장 진심으로 와닿는다는 것을 이 노래를 통해 알게 됐다. 왜냐하면 그 말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이 노래를 배경음악 삼아 나에게 위로를 건네주고 나의 행복을 빌어주던 그 동네언니, 동생,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정말 고마워서 쓰는 글이에요.'하고.



작가 김연수는 스물넷에서 서른두 살 사이의 사람들을 인생의 정거장 같은 나이라고 했다. 늘 누군가를 새로 만나고 또 떠나보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는 나이. 그 누구와도 가족처럼 지낼 수 있으나 다음날이면 남남처럼 헤어질 수도 있는 나이. 하지만 그 아무리 인생의 정거장 같은 나이라도 해도 떠나보내는 것과 헤어지는 것은 언제나 슬프고 어려울 뿐이라는 걸 나는 왜 이제 알았을까. 머릿속으로 그 누군가들과 함께 보낸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지만 나는 또 짐짓 '이제 서른두 살이 넘어서 눈물이 나는가 보다'하며 눈을 감았다.

눈을 떠보니 낯선 동네. 이곳에서 나는 또 누군가를 만나고 또 누군가와 헤어지겠지. 언젠가 다가 올 미래의 그날엔 절대 눈물을 참지 않고 그 누군가를 먼저 꼭 안아주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새 집으로 씩씩하게 들어섰다.





이전 16화 장래희망은 동네 할머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