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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Mar 26. 2022

나의 불면증에게

다시 만난 세계 / 소녀시대


아이고, 말도 마.

누군가 지금 내 안부를 묻는다면 나는 이 말로 이야기를 시작해 막 웃다가 결국엔 그 웃는 표정으로 울어버릴 것만 같다. 그동안 나는 씩씩하게 살아온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고 왜 더 세련되게 해내지 못하는지, 왜 더 빨리 움직이지 못하는지, 왜 더 근사하게 굴지 못하는 지를 자책했다. 그래서 마치 그렇게 사는 '척'을 열심히 하다가 그만 병에 걸려버렸다. 사실 그동안 몸의 징후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냥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라며 무시했고, 그 무시의 대가는 어느 날 불면증이라는 이름으로 내 앞에 떡하니 주문한 적 없는 택배처럼 도착해있었다. 몸 구석구석에서 '야 이 뇌 자식아! 제발 정신 좀 차려!'하고 아우성을 치고 나서야 나는 내가 그동안 나만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나를 위해서 했다고 생각한 것들도 모두 주변 사람들의 안위와 평화를 우선했다는 것을, 오르지 나만을 위한 선택은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그만큼 나를 돌보는 일을 내팽겨 치고 있었다는 것을.

언젠가 힐링캠프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이효리가 나와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밖에서는 명품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다니지만 정작 매일매일 쓰는 수건은 다 떨어져 가는 한 장밖에 없었다고.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차도 사고 집도 사고 아이가 사달라는 건 다 사주고 때가 되면 여행 다니고. 그러면서 내가 먹고 과일 한쪽도 괜히 아까워 아이랑 남편과 깎아주고 복날에 닭을 삶을 때도 두 마리만 사고 점심도 아이가 전 날 남긴 저녁 반찬으로 대충 먹어 치웠다.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그냥 내가 나를 그렇게 취급하며 아껴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서 사람은 금방 변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내 생각만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픈 엄마 때문에 여기저기 동냥하듯 맡겨지느라 잔뜩 예민해진 딸 걱정, 자기 몸도 성치 않은데 나를 돌보러 지방에서 올라온 엄마 걱정, 하루에 한 번씩 안부 문자를 보내면서도 내가 부담스러울까 고민하는 아빠 걱정, 하루 종일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일하는데 돌아와서도 나를 돌봐야 하는 남편 걱정,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며느리 먹으라고 갖은 반찬을 만들어 보내시는 시어머니 걱정, 매일 언제든 내 전화를 대기조로 기다려주는 동생과 시누이 걱정, 가족들에 대한 걱정으로 내 마음은 점점 더 괴롭고 더 깊은 동굴 속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보다 못한 남편의 손에 이끌려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정신 가정의학과에서 상담을 받게 됐고, 그때 내 몸과 마음의 상태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정말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꼬박 삼일을 뜬 눈으로 새우던 내가, 6시간을 내리 푹 자고 일어나 이렇게 노트북 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다는 자체가 그걸 증명해주고 있다.


잠이 너무 안 와 깜깜한 밤을 원망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정말 생뚱맞게도 결혼식 장면이 떠올랐다. 신부 입장을 앞두고 내 결혼식 사회를 봐줬던 (지금은 아나운서가 된) 친한 언니가 나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하던 순간이. '강윤이는 아무리 사소한 일도 특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에요'라고. 그 말이 대뜸 마음속으로 날아들며 내가 만들었던 식전 영상의 노래가 BGM으로 맴맴 맴돌았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도대체 왜, 결혼식의 식전영상으로 10대들의 순수함과 열정을 담았다는 팝 댄스곡을 선택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때는 그 노래만이 내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믿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소녀시대의 멤버들과 나는 또래고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그녀들이 이 노래로 데뷔를 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실제로 스무 살이라는 '다시 만난 세계'를 경험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제2막, 결혼이라는 새로운 세계 앞에서 이 노래를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지금 현재, '나'를 잊은 채로 살아오느라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은 내가 진정한 '나'를 다시 찾으러 가는 길목 앞에서 또다시 이 노래를 떠올린다.



전해 주고 싶어

슬픈 시간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눈을 감고 느껴 봐 움직이는 마음 너를 향한 내 눈빛을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앞에서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 줘 상처 입은 내 맘까지

시선 속에서 말은 필요 없어 멈춰져 버린 이 시간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 왔던 헤메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제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 가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

이 순간의 느낌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앞으로 나는 이 노래가 말해주는 대로 살아볼 작정이다.

움직이는 마음을 눈을 감고 느껴볼 것이다.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고,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쫓아 가 볼 것이고, 이 순간의 느낌을 절대 잊지 않으며, 생각만 해도 강해지는 사람들과 언제까지나 함께할 것이다.

다시 만난 이 세계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불면과 싸우느라 지친 마음에도 민들레 홀씨 같은 설렘이 사뿐하게 앉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88년생 엄마의 플레이리스트'라는 글을 쓴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마음에 만들레 홀씨처럼 사뿐히 공감으로, 위로로, 추억으로 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노래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사이자,

내 옆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자,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자,

나의 글을 읽어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해주는 말로 글을 맺으려고 한다.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 줄게.

상처 입은 네 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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