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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Mar 26. 2022

그의 하루

또 하루 / 개리



아이를 가지고 낳으면서 나는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내가 듣고 싶을 때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새삼 알게 됐다. 태교를 하면서는 클래식 음악이, 육아휴직 중에는 핑크퐁이나 뽀로로 동요가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가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인기 가요들로 그나마 숨통을 틔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원래 듣던 음악과는 동떨어진 음악 세계에서 허우적대다 복직을 했던 시기에, 우연한 기회에 남편과 단둘이 노래방엘 가게 됐다. 갑자기 주어진 하루 휴가에 뭘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들어간 곳이 겨우 노래방인 게 어쩐지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남편과 한낮의 노래방’이라는 게 너무나 신선한 조합이라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하기도 했다. 최신 가요 중엔 아는 노래가 하나도 없었고,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 거였더라, 싶었지만 그냥 서로의 귀는 없다고 치고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마음껏 부르자고 했다. 그리고 노래방 책자를 앞쪽으로 부지런히 넘겨가며 에코의 ‘행복한 나를’을 찾고 있는데 남편이 책자 맨 뒤쪽 최신가요 부근에서 한 노래를 찾더니 당당하게 숫자를 눌러가며 예약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노래가 바로 개리의 또 하루였다.  

개리? 랩? 또 하루?  

나는 순간 다다다 세 번의 충격을 받았는데  

첫 번째로는 저 노래가 너무 남편의 취향이 아니라서 놀랐고, 둘째로는 내가 저 노래를 모른다는 것에 놀랐고, 세 번째로는 내가 모르는 요즘 노래를 남편이 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렇게 충격의 도가니 속에서 시작된 남편의 노래는 더욱더 쇼킹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너무나도 랩을 잘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에코의 노래를 예약하는 것도 잊은 채 감탄하며 듣다가 심지어 앙코르를 외치고 앙코르로 불러준 노래는 녹음까지 하고 말았다. 남편이 마냥 예쁘던 시기는 절대 아니었고, 오히려 꼴 보기 싫을 때였는데 녹음까지 했다는 건 정말 노래가 좋았던 것.  

 

 

나 홀로 외로워진 밤에

모든 게 버거워진 밤에

I love you I need you

You 네가 필요해

나 홀로 술 취한 이 밤에

모든 게 그리워진 밤에

I love you I need you

You 네가 필요해

네가 필요해

 

 

알고 보니, 남편은 돈 한 푼 아껴보겠다고 스트리밍도 안 하고 그냥 그 당시 인기 TOP 100을 다운로드하여 들었는데, 이 노래가 그중에 하나였단다. 캄캄한 새벽에 출근하고 캄캄한 밤에 퇴근하며 매일 이 노래를 어쩔 수 없이(?) 들었다는데, 그에게 나 홀로 외로워진 밤이, 모든 게 버거워진 밤이 너무나도 많았을 것 같아 갑자기 마음이 아파왔다.   

남편 랩을 들으면서 혼자 막 깔깔대고 웃다가 대학 때는 풍물패를 하며 장구를 치던 사람이 이 노랠 얼마나 많이 들었으면 이렇게 랩을 잘하게 되었나 싶으면서 정말로 갑자기 눈물이 났다. 엄마에게 필요한 위로와 응원만큼 똑같이 아빠에게도 위로와 응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너무 당연하게 잊고 지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던 것이다.   

 

-

 

웃고 울었던 그 노래방 회동으로부터 3년이 넘게 흘렀지만, 내가 아는 그의 하루는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개리의 ‘또 하루’의 가사처럼 늘 똑같고 늘 피로하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침의 80%는 개운치 않고, 시작하는 하루는 어제와 똑같고, 위에서는 누르고 아래에서는 치고 올라오고, 어딜 가나 하라면 해야 하고 싫으면 관둬야 하고, 매일 편의점 간판처럼 눈에 불을 켜고 일을 하니 언제나 기분은 초여름 장마. 하지만 그래도 일할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피곤한 언쟁은 됐고 내 옆에 마음 맞는 몇 사람과 함께 즐길 술만 음악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말하지는 않아도 여전히 홀로 외로워지는 밤이, 모든 게 버거워진 밤이 많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도 출퇴근길 경비아저씨에게 건강음료를 한 번씩 건넬 줄 아는 씩씩한 직장인이자, 영화관에서 자리를 못 찾고 헤매는 조금은 궂은 인상의 지적장애인을 모두가 모르는 채 할 때도 홀로 일어나 자리를 안내해주고 돌아오는 선량한 시민이자, 옆집에 혼자 사시는 할머니가 폐지를 모으신다는 걸 어찌 알아내곤 집에서 나오는 박스라는 박스는 모두 분해하여 단정히 정리해 할머니께 가져다 드리는 따뜻한 이웃 주민으로 살아가는 나는 그의 하루가 성공적이지는 않더라도 행복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고, 감히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술이나 한잔 할까

친구에게 전화를 거네

뭔가 별일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잠깐 얼굴이나 보고 가면 어떨까

커피 한잔이라도 아님 술을 마셔도

뭐든 난 좋으니까 잠깐만 나와

우린 성공해야 해

아니 행복해야 해

 

 

오늘은 남편이 퇴근하고 그냥 잠깐 친구의 얼굴을 보고 왔으면 좋겠다. 우리가 또 하루를 보내는 이유는 성공이 아니고 행복일 테니까.  

다시 또 남편과 둘이 노래방을 가게 된다면 남편은 어떤 노래를 부를까. 남편의 플레이리스트가 새삼 궁금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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